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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人 in] 소화요소 없는 쌀, 발효식(김치·장류·장아찌)과 함께 드셔야 독소 빠진답니다

40세 때 간경화 1년 시한부 선고 김치·장류 위주 식생활로 치유 380. 장독대 숫자다. 사찰음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선재(善財.55) 스님이 꾸리는 살림이다. 그냥 장독대가 아니다. 거기에는 7~10년씩 묵은 간장이 담겨 있다. 스님은 지난해 가을 이 간장을 떠다가 미국으로 갔다. '미국 최고의 요리학교'로 불리는 뉴욕의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간장 맛을 선보였다. 7년 묵은 간장이었다.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맛!"이라고 감탄했다.  13일 서울에서 선재 스님을 만났다. 최근 스님은 『선재 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불광출판사)을 냈다. 『선재 스님의 사찰음식 』이후 11년 만에 낸 책이다. 스님에게 음식과 자연 몸과 수행을 물었다. -40세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가 음식 때문에 살았다고 들었다. "아버지와 오빠 두 분이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마흔 살 때 내게도 간경화가 왔다. 의사는 '1년밖에 못 산다'고 말했다.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속가(俗家)의 어머니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 그래서 어찌했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걸어서 10분 거리를 서너 번씩 쉬면서 갔다. 일단 절집에서 맡은 소임을 그만 두었다. 그때만 해도 음식을 아무 거나 먹었다. 조미료도 넣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빵도 먹고 라면도 먹었다. 일단 그걸 다 끊었다. 그랬더니 몸에서 조금씩 면역력이 생기더라." -식사는 어떤 식으로 했나. "시골에서 장 담그고 그걸 먹었다. 아침은 가볍게 점심은 나물을 기름에 묻혀 먹기도 했다. 저녁은 아침보다 많게 점심보다 적게 먹었다. 밤에는 안 먹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병원에 갔더니 '앓았던 자리에 흔적은 있는데 항체가 생겼다. 이런 경우는 1000명 중에 1명도 안 된다'고 하더라."  -무엇이 병을 치유했나. "간장.된장 등의 장류와 김치 제철음식만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충분히 쉬어주었다. 그랬더니 우리 몸의 치유력이 작동하더라. 그때 알았다. 발효음식이 중요한 걸 말이다." -왜 중요한가. "음식은 약도 되고 독도 된다. 음식이 소화되고 난 뒤엔 장에 변이 남는다. 그건 독소를 내뿜는다. 그래서 배설이 중요하다. 발효음식은 그걸 도와준다."  -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서양의 주식은 빵이다. 빵은 발효음식이다. 그들은 와인도 곁들여 먹는다. 와인은 발효음식이다. 고기를 와인에 절이는 것도 같은 이치다. 고기의 독성을 와인이 중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의 주식은 뭔가. 쌀이다. 쌀에는 소화 효소가 없다. 그래서 김치와 장류 장아찌 등을 함께 먹는 거다. 그런 발효음식이 소화를 돕고 배설을 돕는다. 거기에는 수천 년의 지혜가 녹아 있다." -제철음식은 왜 중요한가. "제철음식은 치료약이자 예방약이다. 계절에 따라서 병이 오고 계절에 따라서 치료제가 온다. 그래서 계절에 따른 음식을 먹으면 병도 치료된다. 가령 오이는 차가운 기운이 있다. 소금에 절인 오이를 여름에 먹으면 약이 된다. 그러나 겨울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걸 중화시키려면 오이를 매운 고춧가루에 묻히거나 고추장에 찍어서 먹으면 된다. 고추에 열이 있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몸 안의 면역력이 달라진다. -식견이 대단하다. 사찰음식 때문인가. "스님들은 산에서 산다. 산나물은 산사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다.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이 미역이나 다시마를 자주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에 살다 보면 자연스레 산짐승과 친해진다. 산짐승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준다." -어떤 식으로 일러주나. "예를 들어 뱀이 피부에 뭐가 났다. 그런데 '소리쟁이'라는 들나물에 자기 몸을 비빈다. 그랬더니 뱀의 피부가 낫더라. 또 덫에 걸려서 다친 토끼가 있다. 그런데 '톱풀'을 씹어서 자기 몸에 바르더라. 그랬더니 낫는다. 그걸 지켜보면서 아는 거다. 소리쟁이.톱풀을 먹으면 독소가 빠지는구나. 실제 그걸 먹으면 장 운동을 촉진하고 우리 몸의 독소를 품고서 배설하는 역할을 한다." -산짐승도 자연의 일부다. 결국 자연이 일러주는 건가. "그렇다. 자연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거다. 약은 독이란 말과 통한다. 우리 몸을 치료하는 약도 실은 독이다. 약초가 강하다는 말은 독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데치거나 삶아서 독소를 중화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간장이나 고추장이 그런 역할을 한다. 발효음식이 독을 중화시키기 때문이다." -요리와 수행 둘은 통하나. "그렇다. 가령 3000원짜리 배추를 샀다. 그 배추가 내 손에 오기까지를 보라. 배추는 햇빛과 물과 흙과 바람의 기운을 받고 자랐다. 그런 기운이 배추와 함께 내게 오는 거다. 거기에 양념을 하는 거다. 그게 배추의 수행이다. 양념을 통해 부족한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뺀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배추가 익는다. 그럼 김치가 된다. 그게 배추의 성불(成佛)이다. 수행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인은 온갖 음식에 노출돼 있다. 어떻게 먹어야 하나. "부처님께선 소식(小食)하라고 하셨다. 육식보다 안 좋은 게 과식이다. 소화가 잘 안돼 몸에 독소가 쌓인다. 밥 먹을 때는 꼭 발효음식을 함께 먹어라. 모든 음식의 소화와 배설을 돕게 된다. 수행도 그렇다. 마음의 소화 마음의 배설이 잘 되는 게 수행이다." 백성호 기자

2011-05-18

[사람人 in] 오바마 닮아 인생역전…백만장자 꿈 눈앞

방송 작가서 배우로 행사·광고 출연 맹활약 연기·발음 연습으로 내명의 캐릭터 잡아 "연설때 입술 왼쪽 고개 오른쪽 기울어" 2008년 11월4일. 하루종일 초조하게 TV를 지켜보던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갔다. 공원에 몰려 있는 군중을 향해 스피커를 잡았다. 그를 본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오바마! 오바마! 오바마!' 그의 이름은 레지 브라운(30.사진)이다. 오바마의 '임퍼스네이터'(Impersonator.대역배우)가 그의 직업이다. 대역배우를 하기 전에는 시카고 NBC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의 삶도 바뀌기 시작했다. 각종 행사 출연과 광고모델 섭외가 이어졌다. 지난달 21일 LA에서 있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후원금 행사에 참석한 그를 만났다. - 오바마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 혹시 친척인가.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고향인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논란이 일면서 출생증명서를 보자는 사람도 늘었다. 대통령처럼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 대통령이 시카고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오바마 의원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족보(Family tree)를 살펴보기도 했지만 오바마 가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 대역배우들은 실제 인물과 더 닮아보이기 위해 성형수술도 받는다던데. "성형은 하지 않았다. 나는 눈동자가 녹색이어서 컬러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다. 올해 서른이 됐다. 61년생인 오바마 대통령은 흰머리가 있어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보이도록 파우더로 분장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닌다. 오바마 대통령이 결혼했기 때문이다.” - 오바마 대통령은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다.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수영을 한다. 다행히 키도 6피트1인치로 대통령과 비슷하다. 대통령이 연설할 때 입술이 왼쪽으로 치우쳐 올라가고 고개가 약간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은 특징들을 잡아내 집중적으로 연습한다. 문제는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의 캐릭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데다 연설도 잘하고 유머감각도 뛰어나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수개월 동안 연기수업도 듣고 발음지도를 따로 받아야 했다. 대통령의 말투 발음과 억양을 흉내내기 위해 오바마 자서전 오디오북을 사서 듣고 연습했다." -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나. "나는 엔터테이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 내 일이다. 정치성향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오바마가 주장하는 많은 것을 지지한다. 그가 재선에서도 이겼으면 좋겠다." - 대통령의 이미지를 안좋게 할 수 있는 의뢰가 들어 온다면. "물론 대역배우니까 오바마 대통령을 풍자하는 역할도 맡을 수 있다. 거액을 줄 테니 대통령을 공격하는 광고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도 실제 왔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을 존경한다. 가능한 그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어느날 오바마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대통령 역으로 출연하고 싶다." -돈은 많이 버나. "불경기라 행사들이 많이 줄었지만 1급 대역배우들은 연간 10만달러 이상은 충분히 번다. 올해는 100만달러 이상을 버는 것이 목표다. 부시 대역배우는 시간당 3만5000달러를 받기도 했다. 빌 클린턴 사라 페일린 대역배우들과 함께 하는 45분 행사에 보통 1만5000달러 정도를 받는다. 자선행사에 초청받으면 여행경비만 받고 무료로 출연하는 경우도 많다. 여행을 좋아해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도에 따라 주머니가 얇아졌다 두툼해졌다 한다. 건강보험 개혁 때는 보험회사 광고 섭외가 없어지기도 했다." - 대통령 대역배우로 살면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한 번은 비행기에 늦게 타게 됐다. 일반석 뒷자리인 32B석을 받았는데 이륙 전에 승무원이 오더니 '대통령 각하 1등석이 준비됐습니다'하면서 2B로 옮겨줬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대통령을 만난 것처럼 호의를 베푼다." -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나. "누군가가 나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많이 수줍어했다. 지금은 자연스레 즐긴다. 물론 안좋은 기억도 있다. 술에 취한 20대 청년이'지난 선거에서 난 존 매케인을 찍었다'며시비를 걸기도 했다." - 언제까지 오바마로 살 계획인가. "지금 하는 일이 즐겁다. 그래서 행복하다. 어머니는 나를 포함해 5명의 자식을 키웠다.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다. 개인 생활과 분리하려고 한다. 언젠가는 나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레지 브라운이지 오바마가 아니다." ☞정치인 대역배우가 많은 이유는. '정치'만큼 코미디의 좋은 소재는 없다. 일반인들에 웃음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스토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을 흉내내는 대역배우 중에 유독 정치인 대역배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분장술이 발달하면서 외모보다는 정치인의 캐릭터를 얼마나 잘 뽑아내 흉내 낼 수 있는 지가 대역배우의 성패를 결정하는 열쇠가 됐다. 대통령 대역배우로 유명한 스티브 브릿지스(Steve Bridges)는 부시, 클린턴, 심지어 오바마까지 소화해낸다. 부시 대통령(왼쪽)과 대역배우인 스티브 브릿지스가 2006년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행사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그와 인터뷰 후 소주·김치 좋아하는 '대통령' "각하, 소주 한잔?" 인터뷰 후에 레지 브라운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대통령 각하, 소주나 한 잔 하러 가시죠." 그가 인터뷰에서 김치와 갈비를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LA한인타운 마당 쇼핑몰에 위치한 한식당 '반' 을 찾았다. 그는 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세그릇이나 비웠다.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이 주연으로 나온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을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로 꼽을 정도로 한류에 푹 빠져있다. 한국에 방문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대통령이 한인타운에. 레지 브라운이 인터뷰를 위해 중앙일보에 왔을 때다. '여러분, 대통령이 왔습니다' 고 소개를 하자 눈썰미 좋은 편집국 기자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역배우임을 알고서도 사진 요청이 이어졌다. 며칠 뒤 LA한인타운에 오바마 대통령이 왔다 갔다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범인은 페이스북. 소셜네트워크를 타고 중앙일보에서 찍은 그의 사진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김기정 기자

2011-05-06

[사람人 in] 22년째 아내 손발되어 간호…곁에 있어준 것만으로 감사

너무 힘겨워 동반자살 생각도 사랑과 믿음으로 고난 이겨내 "모두 내려 놓으면 모두 얻는다" 행복 공식 함께 실천해 보세요 심한 교통사고 후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할 수 없게 된 아내를 20년간 돌봐온 홍미현 장로(나성영락교회:86)는 요즘 '삶의 성취감'과 '감사'로 더 없이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며칠전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아내(홍윤경:76)와의 결혼 50주년 기념 행사를 조촐하게 치렀기 때문이다. '금혼식'은 아내를 돌보는 동안 그가 꿈꾸며 온 가장 큰 바람이었다. 97년 아내의 치매 증세가 시작됐을 때나 6년전 자궁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도 그는 "제발 살려만 주십시요"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곤 했다. 결혼 50주년 '금혼식' 만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하나님에게 졸랐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네요. 자궁암 선고를 받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그 힘든 방사선 치료를 다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 했으니까요. 70이 넘어서 거동이 점점 더 힘들어져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걷기도 힘든 상태지만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감사할 뿐 입니다." 주변에서는 이런 홍장로의 극진한 아내 사랑을 '믿기 힘들 정도'라고 감탄해 하며 '부부 사랑'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연세대 동기 동창인 김동길 교수도 LA를 방문할 때면 빼놓지 않고 반드시 찾는 사람이 바로 홍 장로다. "이 친구 만나면 천사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아주 맑아진다"고 주변사람들을 부부동반 초청해 홍장로 부부를 소개하곤 한다. 몸이 불편한 아내 곁에 앉자 음식을 잘게 잘라 입에 넣어주고 혹시라도 흘릴새라 냅킨으로 얼른 입 닦아 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이상의 부부애 현장 강의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금혼식에는 3 자녀 부부와 4명의 손자 손녀가 모두 참석 큰 자리 펴놓고 큰 절을 올렸다. 친구들 만나 골프는 커녕 식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자신의 삶을 모두 내려놓고 아내 곁에서 불만없이 20여년을 보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서 절을 올리며 이들은 모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큰 아들인 소아 치과 전문의 브라이언 홍씨는 자신들이 어머니를 돌보지 못함을 늘 미안해 한다. 대신 가정부나 간호사를 고용하라고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지만 홍장로는 단 한번도 아들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이 돈을 모았다 오히려 생활이 어려운 친척과 이웃을 도와왔다. "내 손으로 돌볼 수 있는 데 왜 남에게 시킵니까? " 6년전 자궁암으로 어머니가 심하게 아플 때는 곁에서 간호하는 아버지가 안스러워 딸들이 "이제 우리 엄마 데려가 주십사'고 기도하자 홍장로가 버럭 화를 냈다. "별소리 다 하는구나. 세상 없어도 금혼식은 치러야 한다." 그 6년이 지나 금혼식을 치르고 나니 홍장로는 요즘 아내 나이가 80 되는 4년 후로 다시 하나님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1972년 이민와 커피샵을 운영하며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당차고 똑똑한 아내와 1남2녀 키우며 열심히 이민생활을 일궜던 홍미현 장로에게 큰 풍파가 닥친 것은 1989년. 10여년간 잘 꾸려온 커피샵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다른 비즈니스를 찾아 다니던 중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온 상대방 차가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아내 쪽을 치면서 차는 대파됐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실신 3차례의 뇌수술을 받게된 것이다. 뇌수술 이후 아내는 심한 뇌 기능 장애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먹고 자는 일에서부터 대소변 치르는 일까지 남편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그때부터 완전히 밖의 일을 끊고 아내를 돌보기 시작한 홍미현 장로는 한때는 '동반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너무나 힘이 들고 암담해 함께 죽자고 마음 먹고 차를 어디로 몰고 가서 어떻게 떨어질까 구체적으로 답사(?)까지 하고 루트를 연구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문득 결혼식 때 하나님 앞에 손들고 "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서약이 머리에 떠올랐다는 것. '만약에 내가 환자의 입장이고 저 사람이 돌보는 상황이었다면 이런 마음을 품기나 했을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홍장로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회상한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것도 마음을 되돌리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단 한번도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내한다. 지금도 거실 한쪽에는 홍장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날자(1997년 9월9일)가 크게 써 붙여져있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져 또다시 바보같은 생각을 하게될까봐 하루에도 몇번씩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아내 돌보는 것을 가상하게 보시는지 건강을 주셔서 지금까지 약 한번 먹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80세 넘은 나이에 혈압도 정상이고 당뇨도 없이 아무 음식이나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건강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 아니고는 힘든 일일 것이다. "요즘은 나도 깜빡 깜빡해서 종이에다 모두 적어요. 아내가 몇시에 소변 보았는지 써 놓아야지 실수를 안 합니다. 아침에는 세상없어도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야 해요. 재빨리 요강을 비워버리지 않으면 한살난 애처럼 뒤집어 엎기도 하니까요." 홍장로에게 낙이 있다면 아내를 태우고 LA 한인타운에 나와 비디오 빌리고 지인을 만나 잠시 점심을 함께 먹는 일이다. 가는 곳은 딱 두곳. 일식은 어원 중식은 만리장성이다. 그곳에서는 이미 단골이 된 이들에게 늘 최적의 자리를 내주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감사할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직은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아내 태우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이렇게 가는 곳 마다 대우받으니 더이상의 바람이 없어요" 성격과 취미가 맞지 않는다며 쉽게 헤어지는 요즘 젊은 커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는 홍장로는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고 부부들에게 "모두 내려 놓으면 모두 얻는다'는 행복 공식을 실천해 보라고 당부한다. 유이나 기자 yena@koreadaily.com

2011-04-13

[사람 人] 김영옥 대령 업적 선양 사회운동 언론인 한우성씨

한국전 양민학살 특집 주목        옆길인 사회 운동가에서 비영어권 첫 퓰리처상 후보        필드 언론인으로 다시 돌아가 김대령 500번 만나 전기 집필       한인사회 위상 신장에 기여하고파 내년부터 제 2차세계대전과 6.25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대령이 한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다. 미주 한인으로는 최초다. 지난 9월에는 UC리버사이드(UCR)에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한인 이름을 딴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지난해 LA한인타운엔 한인 이름을 교명으로 한 김영옥 중학교가 탄생했다. 모두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커뮤니티의 자랑이자 쾌거였다. 이러한 결실의 중심에는 프리랜서 언론인 한우성(54)씨가 있었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저자이자 숨은 사회 운동가인 그는 "모든 일이 벗과 동지들이 있어 가능했을 뿐"이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수 차례 설득끝에 한씨를 지난 28일과 29일 양일간에 걸쳐 만났다. -한우성 자신을 좀 소개해달라. "나는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소속없이 활동하는 미디어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프리랜서 언론인에게 자유의 콘셉트는 다르다. 미디어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는 콘텐트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 잡지나 방송매체 등 모든 미디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만큼 금전적인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웃음)." -어떻게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됐나. "지난 1987년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대학(연세대)때 부전공이었던 심리학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가족을 따라 미국행을 택했지만 생활 형편이 넉넉치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류 통번역 회사에 입사했지만 문화나 인종차별 등 정서가 잘 맞지 않아 퇴사했다. 이 후 우연히 한인 언론사에 입사하게 됐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기사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국제 관계나 한인 이민 역사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6.25전쟁 당시 한국 군경 양민학살 때 아버지를 잃은 분을 만나게 됐다. 당시 이 분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기자는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혼신을 다해 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 군경의 양민학살을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가 나갔고 AP와 AFP 로이터가 이 기사를 전세계에 알렸다. 보도 후 한국에서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기자로서 최고의 기쁨이었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다. "양민학살 기사로 한국기자상 특별상 AP통신기자상 미국 소수계 기자상을 받았고 미주 비영어권 신문 최초로 퓰리처상 후보까지 올랐다. 한인 최초 수상자는 현재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서울 특파원인 최상훈 기자로 2000년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고 김영옥 대령과의 인연은. "김영옥 대령은 내가 순수 저널리스트(언론인)에서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로 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한인 언론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주류 사회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당시 조건은 미국 사회에 대한 공헌도 한인 커뮤니티와 주류 사회의 가교 역할이 가능한 사람 한국과 동포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 한일 관계 개선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제한했다. 하나씩 이름을 지워나가다 보니 김영옥 대령만 남더라. 이 후 1997년 2월 무작정 김 대령을 찾아가서 '당신을 인터뷰하고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 당했으나 나중에 허락을 얻었다. 김 대령 생전에 500여 회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진정한 선구자였다. 그 분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줬다는 자체에 감사한다. 김 대령의 일대기를 책으로 쓸 기회가 주어진 뒤로 기자가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책을 쓰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1999년 일제 강점기 시기 강제 징용에 대한 대일 소송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진행됐다. 집단 소송이었지만 질 경우 여러 사람이 피해자가 되고 역사 왜곡까지 되게 생겼더라. 당시 홀로코스트 소송이 합의되던 시기라 분위기가 일제 강점기까지 번졌다. 결국 직접 나서 변호인단을 조직하고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어 싸울 수 없었다. 연구팀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자금이 없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당시 국제 교류 재단 이사장에게 사정을 밝히고 25만 달러를 받아 연구팀에게 넘겨줬다. 이 무렵 김영옥 대령을 찾아가 책이 늦어질 거 같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내 책보다 소송에 최선을 다해 싸우라'며 '전쟁은 이기는 전쟁만 있는 게 아니다. 질 것이 뻔한 전쟁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원해주셨다. 하지만 결국 2006년까지 계속된 소송에서 졌다. 많은 것이 부족했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을 거치면서 수 많은 벗과 동지를 만났고 이 소송은 재미동포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도 김영옥 대령이 알려지며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국방대학과 육군본부 기업 대학 등에서 강연 제의가 쏟아졌다. 100여차례 정도 강연에 나섰고 김 대령의 이야기는 CJ미디어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예정이다. 하지만 늘 신상을 업고가는 당나귀의 이솝우화를 되새긴다. 당나귀가 새로운 신전에 모실 조각상을 옮기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신상을 보고 멈춰 절을 했다. 당나귀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인사하는 줄로 착각하고 우쭐해져 걸음을 멈춘다는 내용이다. 이런 당나귀가 되지는 않겠다고 수백번도 더 다짐했다." -2010년 많은 것을 이뤘다. 신년 목표는. "오는 2011년 1월부터 국방일보에 김영옥 대령의 스토리가 6개월 동안 연재된다. 60만이 넘는 군장병이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을 배워나가는 계기인 동시에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자랑이 될 것이다. 또한 영문판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작업이 진행중이다. 주류 사회에 김 대령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는 궁극적으로 김영옥 대령이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을 수 있게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때 무공훈장이 가장 큰 척도가 된다. 이는 미국내에서 정치력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한인 커뮤니티는 분명 미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김 대령같은 분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한인사회가 일치 단결해서 일관된 목소리를 내야 김 대령이 미국 최고 무공훈장을 받고 이는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목표는. "사회 운동가에서 순수 저널리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둘다 버릴수 없다. 필드 언론인으로 남고 싶은 희망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한인들의 정체성을 키워 주류 사회에서 위상이 강화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미래가 어떤 시대로 전개되든 한인 커뮤니티와 한국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 하고 싶다." 곽재민 기자 jmkwak@koreadaily.com

2010-12-29

[사람 人] 무도인 40년…'할리우드 사부'로 거침없는 하이킥

"나를 어디서 찾았다고? 아~맞아. 내가 거기에 출연했었지. 그런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던가?" 그의 과거를 알게된 건 전설적인 무술배우 '이소룡'(브루스 리)의 한국 팬들이 만든 한 인터넷 카페에서 였다. 이소룡은 1940년 11월27일 태어났다. '아뵤오~'라고 외치며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렸던 이소룡의 탄생 70주년을 맞아 최근 그를 기리는 인터넷 팬 카페에는 1970년대 홍콩 무술영화의 획을 그었던 작품들과 출연배우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소룡의 팬들은 그곳에서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 '사망유희'와 동시에 만들어진 홍콩 골든 하베스트의 영화 '염굴신탐'(한국에서는 '흑무사'라는 이름으로 상영)의 한인배우 '유병용'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아이.조'에 출연한 영화배우 이병헌 '닌자 어쌔신'에 출연한 가수 비(정지훈)가 할리우드 산을 오르기 30년 전에 이미 한류스타의 꿈을 꾸었던 그를 직접 만나게 된 건 12월 초 한 체육관에서다. 워너 브라더스의 앨런 혼 사장 CBS스튜디오의 마이클 클라우스맨 전 사장 등이 다니는 할리우드의 태권도장이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찾아간 체육관이 유병용의 소유였다. - 미국에는 언제 오셨어요. "1964년에 50달러 들고 UC버클리로 유학왔어요." - 1960년대면 고생 좀 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떠날 때 4년만 미국에 살다 오면 큰 갑부가 되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 빵빵쳤는데 막상 샌프란시스코 도착했더니 갈 곳이 없어요. 어떻게 하나 궁리를 했지요. 영어도 익숙치 않아 노숙자(homeless)라는 단어와 할러데이(holiday)가 혼동이 됐어요. '할러데이 인'이라는 곳에 무작정 찾아 들어갔어요. 사전 찾아보니 인(Inn)은 '자는 곳'이래요. 할러데이 인이라고 하니 노숙자가 자는 곳이라고 생각했지요." - 할러데이 인은 호텔인데요. "안에 들어갔더니 뭐라뭐라 '킹'(King)이냐고 물어요. 어이쿠 내가 어떻게 미국의 '왕'과 함께 자요.'노' 했지요. 또 뭐라뭐라 '퀸'(Queen) 해요. 제가 언감생신 미국의 여왕과 잘 수 있나요. 노(No) 했지요. 조금 있다 '더블'(Double)이냐고 물어요. 두 명이 자는 거구나. 오케이 했지요. 방에 들어가 있는데 밤12시가 되도 아무도 안와요. 뚠 눈으로 미국에서 첫 밤을 보냈어요. 지금이야 그게 킹 사이즈냐, 퀸 사이즈냐, 더블이냐 침대사이즈를 묻는 것인 줄 알지만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 돈은 어떻게 지불하셨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음식 메뉴가 눈에 들어와요. 있는데로 다 시켰지요. 야~ 역시 부자나라 '아메리카'구나. 노숙자에게도 이렇게 잘해주는 구나. 남은 음식은 나중에 먹으려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 싸가지고 나오는데 저를 불러요. 방값하고 식사대하고 53달러를 내라는 거예요. 주머니에 있던 50달러를 모두 줬지요." - 망신을 제대로 당하셨네요. "다른 노숙자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요. 나는 그게 아니지. 그래도 배가 너무 고프거든요. 곰팡이가 난 핫도그가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이미 입으로 갔어요. 몇 발자국 것다가 다 토했어요. 야~ 한국 생각이 나는데…밤새 우는 거지. 그때 다짐을 했어요. 절대 나는 미국에서 처량하거나 초라하게 보이지 않겠다." - 영화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돈을 벌려고 UC버클리 학생과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홍콩의 영화 제작사인 골든 하베스트의 사장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놀러왔다가 제가 태권도 시범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본 모양이에요. 홍콩에 가서 영화를 찍자고 연락이 왔지요. 마침 정창화 감독이 찍는 '흑무사'에 1974년 출연하게 됐지요. 8개월 동안 촬영했어요. 무척 고생했지요. 홍콩, 마카오, 한국을 돌며 찍었지요." - 이소룡의 마직막 영화인 '사망유희'에도 출연했다고 들었습니다. "1974년 이소룡이 갑자기 죽었지요. 영화 속 이소룡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처리되고 저는 이소룡의 친구로서 그의 행방을 찾는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흑무사와 촬영이 겹치면서 사망유희 촬영분은 모두 빠졌어요. 그거 아세요? 이소룡은 어머니가 포루투칼 사람이예요. 이소룡은 머리도 검은색이 아니어서 염색하고 영화에 나온거예요." - 영화는 더 이상 찍지 않았나요. "흑무사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예요. 저는 무술인이지 배우는 아니었어요. 흑무사 영화촬영이 끝나고 뉴욕의 연기스쿨에 들어갔지요. 연기 공부 제대로 해보고 영화를 찍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맏게 되는 역마다 웨이터나 갱스터 같은 나쁜 역할만 들어오는 거예요. 결국 포기했지요." - 그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젊었을 때는 태권도 시합과 시범을 하며 전 세계를 다녔지요. 지금은 태권도, 주짓수, 카디오 등 각종 운동과 영화관, 댄스 스튜디오, 녹음실 등을 함께 갖춘 '월드스포츠센터'를 할리우드에서 운영하고 있어요. 3만2000스퀘어피트 규모입니다. 덴젤 워싱턴, 척 노리스 등 할리우드 배우와 할리우드 제작사의 임원들이 많이 제자로 들어왔지요. 요즘에는 내년 1월15일 76세 생일잔치겸 열리는 무술 시범대회를 앞두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내 꿈을 찾아 가는 거예요. 이제서야…." 글=김기정, 사진=김상진 기자

2010-12-22

[사람 人] 내년 3월 재선의지 다지는 세리토스 조재길 시장

유신 찬양해야하는 교사 싫어       영어 못한다며 가족들 만류 도미 후 부동산으로 백만장자       진심 통하며 시정에도 탄력 반체제 신문 만들다 역경 겪어       마라톤 완주로 새 인생 도전 오랜만에 만난 조재길 세리토스 시장은 젊어져 있었다. '소명'이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내고 66세의 나이에 LA마라톤 완주도 했다. 한국에서 사범학교와 사범대학을 나왔지만 유신을 찬양해야했던 사회 선생님의 길을 버리고 이민와 미국 주류 정치인이 됐다. 부동산으로 80년대 백만장자가 됐다가 광주민주화운동 후 민주화운동 관련 신문을 창간했다가 파산 직전까지도 가기도 했다. 내년 3월 재선을 앞두고 있다. 녹록치 않은 그의 인생을 들어봤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라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의원들 상대로 설득하고 연설까지 해야 하는 시장이 됐습니다.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웃음) 제가 시의원에 나가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들 셋(광서37.준석35.지아34)이 결사 반대 했습니다. 이유는 똑같았어요. '아빠 영어 때문에 어떻게 하려고?'였어요. 첫 선거가 2003년 이었는데 2001년인가요 캠페인과 동시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믿는 구석은…언어도 중요하지만 진심이 중요한 듯합니다.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열심히 하려니깐 다른 의원들이나 시민들도 믿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치는 협상'이라 할 정도로 서로 소통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도 영어 울렁증이 있어요. 정말 귀 기울여도 70%~80%밖에 못 알아듣는데… 세리토스 시의회 회의 장면은 TV로 생중계되는데 토론도 있고 진행 발언도 있고 유권자들이 그걸 다 보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1세는 발음이 제일 문젠데 토론도 연습하고 연설할 건 전날 밤에 연습을 철저히 하고 갑니다. 2002년에 첫 선거 준비할 때 선거 코디네이터(샌드라 곤잘레스)가 저 한테 '정말 크레이지다. 선거시작하면서 영어 공부하는 출마자는 처음본다'고 웃었어요. 지금은 9년이나 됐으니 그때보다 훨씬 낫습니다.(웃음)" -가장 큰 장벽(언어)를 두고도 출마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2000년으로 기억되는데 세리토스 시의회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시의원의 발언 중에 '한국 커뮤니티가 세리토스 최다 인구로서…' 이런 말이 들려요. 실제 확인해보니 최다인구였습니다. '아이고 한국사람들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그럼 너는 뭐하냐'는 말이 뒤통수를 퍽 때리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LA타임스에 90년대는 히스패닉 정치력이 커졌고 2010년까지는 아시안의 정치력 특히 중국 정치력이 굉장해질 것이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분석이 아주 치밀했는데 그 이유가 93년에 생긴 '재미중국인권익신장협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인 정치력 신장위원회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 생각이 들고 바로 2003년에 출마하신 것 같습니다. "처음 출마는 제 당선을 위한 캠페인이라기 보다는 세리토스 한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이었다고 봐야죠(웃음). 당선 안될 거라 생각했지만 한인 커뮤니티만 상대로 유권자 등록 캠페인 열심히 해서 900명이 더 등록했습니다." -2005년에 두번째 출마할 때는 한인후보가 둘이었지 않습니까? "사실 두번째 선거 때는 아들이 출마할 계획이었습니다. 한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였으니 다음 목표는 타커뮤니티인데 제가 영어에 자신이 없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한인 후보는 없고 가족회의 결과 젊고 활기찬 아들이 나가기로 했죠. 그런데 다른 한인 후보 한명이 더 나온다는 소문이 돈 겁니다. 만나서 단일화를 얘기하려 했는데 못 만났어요. 그런데 일부에서 저를 낙선시키기 위해 한인후보를 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가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직후에 코리안스트리트저널이라는 주간지를 냈는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신문이었습니다. 그걸로 색깔 시비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건 내가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출마했습니다. 아쉽지만 한인후보 둘다 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뒤로 좀 가보겠습니다. 부동산으로 많이 벌고 광주민주화 후에 신문업으로 직업을 바꿨는데 그 정도로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나요? "제가 서울대 사범대 사회교육과를 입학할 때가 61년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함께 갔죠. 공군장교를 마치고 사회 선생님이 되었을 때 저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회 선생님이어야 했는데 유신체제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변해갔습니다. 사범학교(경북안동사범학교)나오고 사범대를 나와서 직업이 선생님으로 정해졌는데 유신을 가르치는 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유학을 준비했죠. 미국으로 와서 청소부에 개스 스테이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LA카운티 전산실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는데 다시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거죠. 분노했습니다.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인생을 바꿔준 잊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까? "부모님이 일본 큐수에 징용간 사이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두살 때 고향(충북 단양)으로 가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안동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인생이 '선생님'으로 정해져 너무 뻔한 겁니다.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죠. 문제아로 흘러갔습니다. 그때 교무주임 선생님(나동성)이 부르시더니 '목표를 주겠다. 대학 갈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뭐 대학갈 형편이 안됐죠. 빨리 사범학교 졸업해서 선생님 돼서 돈 벌고 집안 살림에 보태고 해야 할 땐데… 그냥 공부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마 지금 제가 없지 싶습니다." -남모를 고민도 있을것 같은데? "2008년에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의원 되고 1년 지나서 '열심히 한다. 잘한다' 이런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세리토스 시의회가 한달에 두번 열리는데 저는 거의 풀타임으로 나가서 일을 하니 그렇게 비친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언어 문제는 본격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겁니다. '내 나이 60대 중반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곧 70살인데 이제 은퇴해야 되는 거 아닌가'하면서 심각하게 시의원 사퇴까지도 고민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저를 사범학교 다닐때 결혼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우리집안 남자들 환갑을 못넘긴다. 나는 손자 보고 죽어야겠다'였습니다. 그런데 93세에 돌아가셨어요. 한국에서 장례 치르고 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집안 오래 사네. 나는 100살까지 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70이면…10년은 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하프마라톤 완주하고 올해 LA국제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아버님이 저에게 다시 건강과 용기를 주신거죠. 2008년같은 고민은 지금은 없습니다. 다만 한인 정치력이 커져서 중국커뮤니티가 부러워 할 정도가 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참 쉽지 않네요." -좀 엉뚱한 질문입니다만 자신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뭘까요? "구수한 뚝배기 맛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주류에서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한국인이고 한국의 맛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뚝배기 맛 정치를 하겠습니다." 글= 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사진= 박요한 기자

2010-12-15

[사람 人] 이태석 신부 다큐 '울지마 톤즈' 제작 감독 구수환 KBS PD

악조건 속에서 제작 강행…감동이 있는 다큐 가능성, 한인사회 방영 화제 만발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된 아름답고 감동적인 얘기…종교 초월한 교훈 됐으면" 동티모르, 팔레스타인, 체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등. 방탄복과 방탄모에 목숨을 의지한 채 웬만한 전세계 분쟁지역은 다 가봤다. 현장을 직접 봐야 정확한 팩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25년 동안 시사프로그램 프로듀서로 한 우물을 팠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접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큐멘터리 PD의 본능을 자극했다. 왜 의사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성직자가 됐는지, 왜 그는 하필 멀고 먼 아프리카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 위해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달 초 LA한인타운 내 CGV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시사회. 가톨릭 신부가 된 의사, 이태석 신부(1962~2010.1.14)의 삶과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주 상영은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이 날 첫 시사회 현장을 찾은 관객 앞에 낯익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이내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어디서 봤지?” “왜 있잖아. 그 시사고발 프로그램 진행자.” 마이크를 통해 “울지마 톤즈를 제작한 KBS 구수환 프로듀서 입니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라며 “종교를 초월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전했다. 짧은 인사말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 그는 영화가 상영되는 90분 내내 상영관 한켠을 지키고 서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호흡을 함께 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 감독으로서 미국을 찾은 KBS 구수환 프로듀서(52)를 만났다. - 영화 ‘울지마 톤즈’가 한인사회에서 화제다. 간단히 소개해달라.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의 휴먼 스토리가 아니다.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지만 종교 영화도 아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허구성 없이 날것 그대로의 정확한 사실만을 카메라에 담아 전달하는 시사 다큐멘터리 영화다.” - 방송용 다큐멘터리가 영화로 탄생했는데.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 수단의 슈바이처가 공중파를 탔을때 천안함 사태가 터져 시청율이 안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영화를 만들며 달랬다. 하지만 180분 분량을 절반인 90분으로 줄여야 해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 제목이 왜 울지마 톤즈인가. “이태석 신부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고 생각해봤다. 톤즈는 내전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로 이태석 신부가 혼신을 기울여 봉사 활동을 한 곳이다. 톤즈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 산다. 딩카족은 울지 않는다. 수단 원주민 가운데 용맹함의 상징인 딩카족에게 눈물은 수치이다. 총상 등 아무리 고통스러운 부상을 입어도, 가족이 세상을 떠나도 울지않는 딩카족이 이태석 신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목놓아 울었다. 그 눈물은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진심어린 눈물이었다. 그 지역 신부들은 그들의 눈물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태석 신부라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을까 고민했다. 비록 당신은 떠났지만 그들의 울음을 멈추게 해 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제목을 선택한 것이다.” - 고 이태석 신부와 인연은. “전혀 없다. 이태석 신부를 단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톤즈에 직접 가고 난 뒤 더욱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였다. 의술로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데도 성직자가 됐다.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아프리카까지 간 이유도 궁금했다. 하지만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가 생전 얘기했던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됐다.” - 수단에서의 촬영은 언제 이뤄졌나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지난 2월 21일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케냐에서 차량으로 수단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톤즈로 향하는 길목이 부족간 충돌로 인해 차단됐다. 회사에서는 촬영을 취소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수소문 끝에 1박 2일을 돌아 다른 루트를 통해 톤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9일 동안의 일정이었다. 수단은 지난 2005년 평화협정에 따라 내전이 끝났지만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다. 군인들에게 잡혀 카메라를 빼앗기는 등 아찔한 위기도 있었지만 현지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 안전문제 외에도 힘들었던 점이 많았을텐데. “날씨였다. 한낮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더위와의 싸움이었다. 밤에도 섭씨 30도가 넘는 열대야가 지속돼 2시간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물을 틀어도 뜨겁고(웃음). 음식도 문제였다. 한국에서 공수해간 음식은 대부분 주민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쫄리(이태석 신부의 영어이름인 존 리를 그들은 쫄리라고 부른다) 신부와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를 살갑게 대했다. 문득 이태석 신부는 이런 곳에서 7년을 지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부끄러워서 잠자리 투정도 못하겠더라.” - 아프리카 촬영 중 울었나. “톤즈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그리움과 그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가득했다. 이태석 신부의 장례식 동영상을 보여주자 그 곳 사람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는 아이를 직접 촬영하는데 너무 서럽게 울어 카메라를 놓고 그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 울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한국에서 찍어 온 영상을 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유품을 가져와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당시에도 모든 스태프가 거의 다 울었다.” - 고발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감동을 주는 감독이 됐다. “울지마 톤즈는 절대 슬픈 영화가 아니다. 긍정과 감동을 주는 밝은 영화다. 하지만 시사 다큐다. 시사는 강하다. 25년간 시사프로그램을 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진 사람들의 배려를 외쳤다. 어떤 실상을 고발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지마 톤즈를 통해 생각이 바뀌었다. 시사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주면서 우리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됐다. 방송국 사람들이 구수환이 저런 것도 만드냐고 하더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삶에 대한 반성과 긍정의 힘, 베푸는 나눔의 정신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제작 의도가 정확히 전달된 것 같아 기분 좋다.” -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개발해 나갈 것이다. 삶에 대해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례를 발굴해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곽재민 기자 jmkwak@koreadaily.com

2010-11-17

[사람 人] '라티노 50년 인생' LA한인노동상담소 최광능 소장

스무살에 엘살바도르 유학, 중남미 첫 태권도 사범 활약…내전 피해 LA로 새터전 마련 "책임 의식 희박하지만 한없이 순박한 사람들…함께 가는 길 모색해야" 언어에 대한 자부심 대단…정치력도 급격하게 커져 그의 삶 속에 있는 일과 가정, 이 두개의 큰 기둥에는 오늘도 라티노와의 인연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최광능씨의 50년 속에는 라틴 아메리카 유학을 이끌어 준 스페인어가 있었고 라티노와 편한 인연을 맺게 해준 태권도가 있었다. 부인도 엘살바도르 출신이다. 비즈니스 할 때는 라티노 파트너와 고객 현재는 라티노 클라이언트들과 일상을 같이 한다. 부산 경남중.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1966년. 같은 해 엘살바도르 국립대학 법학과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혈혈단신 중남미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에 도착했다. 국제법을 전공해 변호사 중 최고의 '중남미 통'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멀리 꼬레아에서 온 법대생은 3년간 학교 교양과목 태권도 교수도 했었다. 중남미 최초의 태권도 사범이 된 셈이다. -태권도 교수라니요? "당시 유학은 전부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시험을 쳐야했습니다. 국비유학 아니면 해당학교 전액 장학금을 받아 나갔는데 생활비가 따로 필요했어요. 그래서 돈 벌만한 걸 배워서 나가는게 유행이었어요. 하나는 태권도 하나는 병아리 감별사였습니다. 저는 부산 무도관 공인 초단이었습니다. 우리 전통무도를 보급하면 좋겠다는 애국심도 있었죠. 그래서 도복과 검은 띠도 가져갔어요. 학교에서 사람들 앞에서 격파 시범도 보였는데…. 그런데 엘살바도르 벽돌이 엄청 크고 두꺼운거예요. 지진 때문에 벽돌이 크다는데 딱 놓고 내려치는데 이거 못 깨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격파했죠. 엘살바도르 사람들 마음의 벽도 함께 허물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게 소문이 나면서 태권도가 학교 정식 체육 교양과목으로 채택됐습니다." -그 당시 유학갈 때 부업거리로 병아리 감별도 배웠다는 게 재밌네요. "병아리 감별은 한국사람들이 세계 최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 감각이 좋아서 그런 것 같은데 어떤 유학생은 그 나라 최고의 병아리 감별사가 됐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태권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당시 산체스 대통령이었는데 그건 아니고 대통령 자녀들이 배운 적이 있죠. 대통령 경호원들도 6개월 가르쳤고 육군사관학교 학생들도 3개월 정도 가르쳤습니다. 한국에 경호원이나 장교들은 특공무술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데 그때 엘살바도르 경호실은 그게 아니었죠." -중남미에 최초로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쉽게 친해지신 거네요. "그때 휴직 중인 조선일보 기자가 중남미를 순회하다 절 만났어요. 1966년 11월에 한국에서 신문에 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최초'라고 하더군요." -부인도 격파하는 모습에 넘어가신 건가요? "그런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요(웃음) 제 집사람은 그때 선생님이었고 야간에 심리학과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근데 처제가 저하고 같이 법학과였어요. 저는 일과 끝나고 집사람은 수업들어가기 전에 식당에서 계속 만나지는 겁니다. 친해졌죠." 부인 루즈 아메리카 최(66)씨는 엘살바도르 인이다. 현재는 LA통합교육구 학부모 컨설팅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부인을 '바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라티노와 국제결혼 1호일지도 모를 부인과의 러브스토리로 더 들어가봤다. -한눈 안 팔고 바로 대시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태권도도 좀 하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웃음). 그때는 '결혼은 한국사람하고 해야 된다'는 인식이 지금보다 더 했죠. 저는 또 유학생이라 당연히 한국 부모님들에게서 허락이 나질 않았죠. LA 와서 한국 여자를 찾아본 적도 있는데 1968년인가 이때는 LA에도 한국사람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집사람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정도 들고 마음이 참 착한 겁니다. 참 동양적이고 바다 같은 사람입니다…. 저희 집안을 잘 설득해서 결혼에 골인했는데 벌써 40년이 됐네요. 참 세월은 빠릅니다" 자녀들이 궁금해졌다. 흔하지 않은 코리안라티노 자녀들은 스패니시 이름과 한국 이름을 함께 갖고 있다. 딸 루즈 미림 최(40)는 소아과 전문의 아들 서지오 단일 최(36)은 영화사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하고 있다. -자녀들 기질이나 스타일은 독특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한국과 라틴 스타일이 두개가 잘 섞인 미국식이라고 할까요. 딸은 좀 더 한국적입니다. 병원에서도 미림 최로 불리고 김치와 된장찌개를 잘 먹죠." 엘살바도르에서 잘 살고 있다 왜 미국으로 왔는지도 궁금해진다. 1980년부터 로메로 주교 암살로 시작된 엘살바도르 내전이 일어났단다. 1992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인구 600백만명중 40만명(비공식 집계)이 사망했단다.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나라를 등졌고 최광능씨 가족도 이때 LA로 이주하게 된다. -LA로 와서 막막했겠습니다. "꼭 그렇지도 않았어요. 외국 첫 생활이 LA였어요. LA에서 학교 서류받고 엘살바도르에 들어갔고 가끔 LA에 왔었습니다. 고향같았죠.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부터 비즈니스를 해야 했어요." LA와 텍사스 휴스턴 라레도에서 비즈니스를 했다. 라틴과의 인연은 거기서도 이어진다. 절친한 파트너와 최고의 고객 모두 라틴계들이었다. 라틴 아메리카 진출을 위해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가 설치한 한국상품센터의 부소장직도 지냈다. 최광능씨를 둘러싼 모두가 라티노와 관련이 있었다. 50년간 느끼고 살아온 그만의 시각이 있을 법 했다. -스패니시나 라티노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잠시 생각하다)우연히 만났다 인연이 됐고 이제는 필연이 됐습니다. 집사람도 아이들도 내 파트너도 클라이언트도 모두 라틴아메리카와 관련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라티노란 특별한 존재인데. "저에겐 직접적 존재이고 한인들에겐 뗄 수 없는 존재 아닙니까. 여러 민족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한인들에겐 라티노들이 가장 좋은 파트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그렇기도 하구요." -한인들과 라티노들은 기질이 비슷한 데가 있죠. "정서가 많이 비슷합니다. 부모나 자녀들에 대한 생각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문화 정이 많은 사람관계…이런 게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체로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이죠. 차분하고 계산적인 한인들과는 그런 면에서 차이가 많다고 할 수 있죠." -불성실하다든지 노는 걸 좋아한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습니다.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시죠. 한인들은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런데 라티노들은 정말 순박합니다. 한인들은 좀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절묘한 하모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라티노들은 한인들이 그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 걸로 압니다. "좀 가난하고 교육수준도 떨어집니다만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특히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많습니다. 절대 무시하지 말고 인간적인 정을 맺으면 이 친구들 오래 갑니다.라티노들의 정치력도 엄청나게 커지고 있습니다. 함께 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좋은 파트너가 될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최씨와는 이틀에 거쳐 5시간 만났다. 라티노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라틴 문화에 대한 애정도 대단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한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라티노들을 더 가까이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사람=천문권 기자cmkn@koreadaily.com

2010-11-10

[사람 人] LA한인타운에 분교 내는 사브리나 케이 프리몬트 칼리지 총장

CDC 매각 후 7년간 경영학·교육학 공부 경영 부실 대학 인수 후 2년 만에 정상화 내달 5일 분교 오픈…교육자로 새 도전 1990년 케이 박사가 설립한 패션 디자인 스쿨 '캘리포니아 디자인 칼리지(CDC)'는 LA의 패션 명문 스쿨로 알려진 FIDM을 제치고 남가주의 대표적인 패션 학교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가위와 재봉틀로 디자인하던 한인 의류업계에 케이 박사는 학생들에게 컴퓨터 디자인을 교육시켜 LA가 패션 리더로 성장하는데 일조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수 명이었던 학생수를 13년 만에 재학생 800명 수준으로 성장시키며 학교 운영에 열정을 쏟았던 케이 박사는 2003년 직업 교육 매니지먼트 회사인 EMC에 학교를 매각하고 교육계를 훌쩍 떠났다. 그후 비즈니스 뱅크와 투자개발 회사를 운영하면서 한편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교육을 위해 자선사업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케이 박사가 다시 교육자로 한인타운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학사 자격을 받을 수 있는 정식 4년제 칼리지인 '프리몬트 종합대학(Fremont College)' 총장이다. 지난 2007년 초 세리토스에 본교를 두고 있는 프리몬트 대학을 인수한 케이 박사는 3년 만에 한인타운 중심부인 윌셔와 마리포사 부근 건물에 분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내달 5일 재단 이사진들을 초청한 대대적인 분교 개교식을 갖는다. 갑작스런 등장 같지만 CDC 매각 후 지난 7년간 그녀는 교육학과 경영학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교육자로서의 기초를 착실하게 다시 쌓아왔다. 이 때만 해도 다시 교육자로 돌아갈 지 예측하지 못했다. CDC 매각 후 당분간 놀면서 지내려 했지만 지인의 추천으로 USC 마셜스쿨에서 운영하는 회사 임원 및 경영인들을 위한 EMBA 과정에 등록하면서 모처럼 찾아온 휴가는 2주간 만에 끝났다. EMBA를 마칠 때쯤 이번에는 주임교수가 케이 박사를 자극했다. "사브리나. 이왕 시작한 거 한번 박사과정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마침 와튼 스쿨에서 학생을 추천하라고 하는데요." 그 말을 듣자 마자 그는 박사 코스 신청서를 작성했다. 남가주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 만큼 기업가로서의 활동도 바쁘지만 한 달에도 수 번씩 비행기를 타고 학교를 오갈 정도로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나만 배우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MBA 박사 코스 교수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됐을 때 그녀는 와튼 스쿨의 교육 시스템을 학생들에게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밝혔고 그 아이디어를 들은 교수들은 일제히 교육학 석사 코스를 권했다. 경영학 박사 코스를 밟으면서 교육학 석사를 시작하는 지독한 강행군의 학생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잠을 자면서 결국 3년 만에 박사 학위와 석사 코스를 끝내자 교수진들과 지인들은 "역시 사브리나답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학위를 취득하자 마자 프리몬트 칼리지 인수 기회가 생겼다. 우연치고는 모든 스케줄과 상황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학교를 인수했다. "그제서야 나도 모르게 늘 한쪽이 허전하게 느껴졌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내가 '교육자'의 삶과 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인수한 프리몬트 대학은 경영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는 곧바로 실력있는 교수진을 대거 영입하는 한편 주류 사회의 이름있는 경영인들을 이사진으로 초청했다. 그녀가 초청한 이사진들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하다. 전 우루과이 대사를 지낸 프랭크 박스터 판다 레스토랑 대표 앤드루 청 은행가 대부로 알려진 '카펜터 앤 컴파니'의 에드 카펜터 대표 웰스파고뱅크 부사장 스티브 맨 등이다. 그녀의 방대한 네트워크와 경영 능력으로 학교는 2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쉬운 거예요. 항상 느끼는 건데 한인 학생들의 실력은 굉장히 우수하거든요. 그들이 주류사회에서 일하고 미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인타운에 분교를 세우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계획을 들은 재단 이사진의 반대가 높아 고민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신념을 믿고 가기로 했다. 올 중반부터 분교 개설 준비를 해온 케이 박사는 이곳에서 스포츠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건강(Wellness)학 경영학 법무학(Paralegal Studies) 디자인학 등을 가르친다. 2년제와 4년제 과정을 마련해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정규 학위도 취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업을 철저히 현장위주로 진행해 졸업 후 학생들이 곧장 전공 분야에 취업하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실제로 케이 박사가 프리몬트를 인수하기 전 재학생들의 취업률은 40%였지만 인수후에는 92%로 뛰었을 만큼 학교 운영 실력을 인정받았다. "저는 학생들이 배운 것을 취업 현장에서 쓸 수 있고 또 회사가 찾는 학생들로 가르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내달 5일 윌셔와 마리포사 건물 10층에 개설된 분교의 개교식을 갖는 그는 "3년 전 프리몬트 대학을 인수 때보다 긴장감이 더 크고 스트레스도 많지만 이번에도 잘 될 것이라는 예감이 온다"며 웃었다. 특히 분교 자리는 7년 전 매각했던 CDC가 있던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는 케이 박사. "사실 CDC를 시작했을 때는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교육 철학도 없이 그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교육에 대한 비전과 함께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하는 것만큼 어깨도 무겁고 긴장도 됩니다." '내가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큰 보람'이라는 케이 박사는 "한인 커뮤니티 한인사회를 이끌고 성장시켜나갈 미래의 리더들을 육성하겠다"고 포부를 피력했다. ▶본교: 18000 Studebaker Rd. #900 Cerritos 562-809-5100 ▶한인타운 분교: 3440 Wilshire Blvd. 10층 213-355-7777 왕성한 활동으로 주류·한인사회에 명성 ◇사브리나 케이 박사는= 이대를 다니다 도미해 캘스테이트 롱비치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LA패션대인 FDIM에서 유학생 담당 디렉터와 입학담당 부디렉터로 근무하다 외국 학생들에게 필요한 이중언어(ESL) 교육과정이 없어 학업 성취도가 부진한 현실을 보고 1990년 디자인 대학을 설립했다. 2003년 CDC 매각 후 여성복 및 아동복 전문 패션 엄브렐라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비즈니스 뱅크인 '프리미어 비즈니스 뱅크' 창립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정치지원 및 자선사업 활동도 활발하다. 청소년 리더 교육 지원 기관인 '영프레지던트협회(YPO)' 벨에어 챕터에 2000년부터 이사로 참여중이며 2004년부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운영하는 교육지원 비영리재단 '올스쿨올스타(ASAS)' LA지부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1996년 가주 정부가 임명하는 커리어칼리지협회(CCA)에 이사로 참여해 2007년부터는 3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밖에 LA시관광청 커미셔너(2005~08년) LA스포츠엔터테인먼트위원회 커미셔너(2003~08년) LA시 개발위원회 커미셔너(2005~08년) 가주장학투자위원회 커미셔너(2000~08년) 한미연합회(KAC)와 LA한인상공회의소 이사 평통 위원 등 활동의 폭이 넓다. 지난 2월엔 가주 주지사가 수여하는 '올스쿨 올스타 교육자'상을 받았으며 99년에는 대형 회계그룹인 언스트앤영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기업가' 97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국제위원회에서 수여하는 '떠오르는 아시안 여성'상을 받기도 했다. 오는 11월 9일에는 세계적인 의료지원 비영리재단인 국제의료단에서 수여하는 '박애주의상'도 받는다. 장연화 기자 yhchang@koreadaily.com

2010-10-27

[사람 人] 사업·단체활동 접고 은퇴 4년째…LA상의 강상윤 전 회장

"성공 집착하며 들볶는 삶, 결국에 아쉬운 마음 남겨…정말 좋아하는 일 했으면" 원단업체를 운영하며 90년대부터는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 3번 회장 2번 한인경제단체협의회 회장 2번 한인회 이사장 등 10여년 넘게 한인사회 일꾼으로 봉사를 겸했다. 4년 전 한인회 이사장을 끝으로 단체 활동과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어 '자연인' 강상윤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언론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그가 중앙일보 문화센터에 나타났다. 최근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동안'은 여전했다. -단체활동도 비즈니스도 접고 뭐 하고 지내세요? "욕심을 놓으니까 모든 것이 편합니다. 숨쉴 틈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른 채 말이죠. 요즘은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행도 자주 합니다. 아침 등산도 일과입니다."(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버뱅크에서 지인들과 만나 한두시간 등산을 하는데 이 덕분에 180파운드까지 늘었던 몸무게가 162 파운드까지 줄었단다.) -옛 친구들도 많이 만나시겠군요. "그렇죠. 바쁘다는 핑계로 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즐거움이 큽니다. 한국에서 친구가 찾아오면 차를 몰고 한 일주일 무조건 떠납니다. 아무데나 가다가 냇물이라도 있으면 라면도 끓여 먹고 하면서 말이죠. 너무 즐겁더라고요. 이 친구들이 한국에 돌아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잇달아 찾아온 친구들과 무작정 여행을 한 게 한 열번쯤 됩니다. 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도 다시 찾게 되고요." -나이 들수록 친구가 참 좋죠. "그럼요.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인 거 같아요. 좋은 사람과 평생 인연을 갖고 가는 것 그것만한 자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쁘게 살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았구나 싶습니다." -이젠 편하게 비즈니스 인생을 돌아보실 수 있을 텐데 브라질에선 어땠습니까. "잘 나가던 직장(대한농산)을 그만두고 브라질행을 택한 건 순전히 '더 큰 물에서 놀아보라'고 자극을 준 부친 때문이었습니다. 72년도에 내가 먼저 브라질에 들어갔는데 막상 동포들의 현실을 보니 막막하더군요. 그냥 포루투갈어나 좀 배워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으로 1년을 지냈는데 부친이 집 팔고 가족 모두 브라질로 오신 겁니다. 그 때부터 정신이 번쩍 들어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의류업에 뛰어 들었고 6개월 단위로 움직이던 당시 주문 관행을 1~2주 만에 해치우는 순발력으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돈 많이 벌었습니다." -미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신 거죠. "70년 대 말 LA에 들르니 금리가 15%까지 되는 겁니다. 반면에 브라질에서는 인플레가 진행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지고 약탈도 곳곳에서 발생하곤 했어요. 불안했죠. 돈을 차근차근 옮기고 81년도에 다 정리하고 LA로 왔습니다." -그 때도 의류업을 시작하셨나요. "그 당시만 해도 LA다운타운의 의류업체들은 유대인 천지였습니다. 한인들은 거의 없었죠. 브라질에서도 유대인 속에서 성공했는데 미국에선들 못하랴 하는 각오로 뛰어들었습니다.(그때 유일했던 한인은행인 외환은행장도 극구 말렸단다.) 하루 현찰 매출이 7만 달러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죠." -위기는 없었나요. "왜 없었겠습니까. 시작하자마자 돈을 쓸어담다시피 했지만 곧바로 멕시코 페소화 폭락 사태가 오더군요. 주 고객이던 멕시코 바이어가 딱 끊기는 겁니다. 재산 절반 정도 날렸습니다." -건축업도 손을 댔다면서요. "페소 폭락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83년에 건축개발회사를 냈습니다. 건축가를 고용해 사장을 세우고 제가 돈을 대는 거였는데 올림픽가에 22유닛 아파트를 지어 성공을 했어요. 그 아파트 개발이 성공하자 의사 투자가들로부터 여러건의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건축 외도는 그걸로 끝냈습니다." -그 다음부터 원단을 하신 거군요. "그렇죠. 그런데 2000년 들어서면서 중국을 돌아보고 나니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가 급속하게 퍼지면서 원단 유통업은 설 자리가 없어지겠다는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4만 스퀘어피트에 꽉 차 있던 원단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바쁜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나니 어떤가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나를 들볶으면서 살았나 하는 후회도 많이 들더군요. 돈만 좇아서 여유없이 살아온 지난 삶에 아쉬움도 크고요. 인생 우습게 살았네 하는 생각도 듭디다. 중요한 것들을 너무 제쳐두고 살았구나 하는…." -인생관 같은 게 달라졌나요. "젊었을 때는 '성공'만 바라보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산 것 같습니다. 시야가 무척 좁았던 거죠. 그런데 지금 여유를 갖고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인간관계고 정이고 사랑이고 보람이고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면서 더 넓게 살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돈을 많이 벌었으니 그런 여유있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웃으며) 돈요? 나이 들면 돈이 있으나 없으나 비슷한 거 같아요. 우리 부부가 요새 소셜 시큐리티 2500달러 정도 받는데 그거면 사는데 불편이 없어요." -살면서 가장 힘이 됐던 게 있다면. "고등학교 때 후배 아버님이 나를 보더니 '상윤 학생 자네는 앞으로 무얼해도 크게 될 걸세'하면서 어깨를 툭툭 쳐 주셨죠. 그런데 그 한마디가 내가 어려울 때 항상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평생 기억에 남는 거예요. 남에게 자신감을 주고 격려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잠시 봉사했던 나눔선교회 청년들에게도 자신감을 갖도록 얘기 많이 했죠." -자녀 분들은요? "위로 두 딸과 막내 아들이 있는데요. 요즘 내가 둘째딸(사이모니)을 보며 많이 느낍니다. 이 녀석이 연봉 20만달러짜리 직장을 그만 두고 미국 펜클럽 멤버로 뽑혀 요즘 작가 수업을 받고 있어요. 난 걱정되지만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밤을 꼬박 새면서도 '아빠 아임 쏘 해피' 하는 이 녀석을 보면서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의 행복 만들기는 뭡니까. "돈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역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할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불우 청소년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보람을 찾는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뒤늦게 컴퓨터는 왜 배우세요? "하하하 큰 용기를 냈죠. 그 동안은 다 시키면 됐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자식들에게 더 이상 의존해서도 안되겠고. 무엇보다 뭔가를 새로 배운다는 게 너무 재밌잖아요 하하하." 〈만난 사람=이원영 기자>

2010-10-20

[사람 人] 한글과 컴퓨터 인수 김정실 회장

LA교육원 매입, 100만불 쾌척 "앞으로 사회사업 계속 할 것" 19년 미국생활 정리 후 한국행…남양주 한강변 악기박물관 건립 "한국 대표 IT 회사로 키울 것" 보안·반도체·전기차 업체 경영 최근 한국의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업체인 '한글과 컴퓨터'가 670억원에 매각되면서 그 이름을 다시 들어 볼 기회가 생겼다. 인수자가 김정실 캐피탈익스프레스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1996년 한인 2세들이 뿌리를 잊지 않고 당당한 미국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달라면 교육원 건물 매입을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교육원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층 강단에 김정실 회장의 이름을 딴 강당을 만들었다. 1998년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정실 회장의 일과 삶 꿈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한국에서 23년 미국에서 19년 생활한 뒤 98년 부터는 다시 한국 에서 지내고 있다. 한국 생활의 장점은. "한국은 뭐든지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다. 미국에서 3개월 걸릴 것이 한국은 다음 날 해결된다. 서류 배송도 퀵서비스가 1시간 내로 왔다갔다 한다. 미국은 오후 6시가 지나면 삭막하다. 집이 아니면 식당에 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24시간 오픈하는 곳이 많다. 보통 해외출장을 갔다가 새벽 5시에 한국에 내린다. 24시간 운영하는 사우나가 있어 지압받고 쉬면 피곤이 풀린다. 무엇보다 한국은 고향이라 푸근하다. " - 일 외에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새벽 2시쯤 자서 오전 8시에 일어난다. 8시30분 부터는 컴퓨터에 앞에 앉아 주식시장을 살핀 뒤 회사로 간다. 월 수 금은 오전에 서울클럽에서 운동을 한 뒤 오후에 출근한다. 요즘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건너편 대지 3000평 부지에 악기 박물관을 건립하고 있다. 한강을 낀 남양주시 덕소라는 곳이다. 클래식에 쓰이는 악기 위주로 모으고 있다. 런던 파리 비엔나에 열리는 경매에 참가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악기들을 사들이고 있다. 비용은 들겠지만 1800년대 피아노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흥분된다. 사명감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 - 어린 시절 얘기를 해달라. "아버님이 의사셨다. 초등학교 때는 선물받은 미놀타 카메라를 들고 주말이면 사진을 찍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가족들이 모두 음악을 좋아해 어려서 부터 피아노를 쳤다. 악기박물관을 생각하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다." - 최근 한글과 컴퓨터(한컴)를 인수했다. 이유는. "한컴은 한국의 상징적인 소프트웨어 업체다. 인수 후 기존 운영업체들과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일부에서 한컴을 또 팔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영을 할 상황이 못 될 경우는 매각을 했다. 하지만 한컴은 다르다. 투명경영을 통해 한컴을 키우고자 한다." - 한컴을 인수한 소프트포럼의 대주주다. 소프트포럼은 어떤 회사인가. 이 외에 다른 회사들은. "소프트포럼은 자본금 400억원 연 매출 200억원 규모다. 인터넷보안 기술개발에 주력해 온 IT기업이다. 이 외에 반도체칩 설계 다윈텍과 지난 봄에 인수한 종합 투자회사 피닉스자산운용사가 있다. 자산운용사의 수탁고는 2조6000억원이다. 또 전기자동차 회사인 ATT R&D도 인수했다. 앞으로 유망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 교육원 건립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지금도 큰 돈이지만 1996년이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신문에 교육원 건립 기사가 나왔다. 좋은 일이다 생각했다. 한인사회가 100만 달러를 모으면 한국정부가 매칭해 교육원을 건립한다고 했다. 언론사에 전화해 얼마나 기금이 모였는지 물어봤다. 10만 달러라고 하더라. 교육원 건립 담당자와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1시간 정도 건립 취지와 운영방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내가 돕겠다고 했다. 교육원 관계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절을 하더라." -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매달 5만 달러씩 지원했다고 들었다. "서울에 잠깐 나올 일이 있었다. 15세 소년가장이 TV에 나왔다. 동생이 4명이 있더라. 리어카 끌고 다니며 깡통 파지 고무신 운동화를 모았다. 학교 점심시간엔 집으로 가더라. 도시락을 쌀 형편이 안됐다. 가슴이 너무 찡했다. 한국복지재단에 연락을 했다. 소년 소녀 가장 200여명을 위해 한 달에 5만 달러씩 돕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 끝날 때까지 도와주마 약속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커서 대학도 가고 취직도 했다." - 앞으로의 꿈과 비젼은. "최선을 다해서 산다. 맡은 것이 있으면 완벽하게 해내려고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 또 회사를 위해서다. 사회사업도 계속 하려한다. 연대 사회사업 대학원과정을 이수했다. 딸 에이미도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다." ■김정실 회장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김정실 회장은 통신업체 자일랜을 나스닥에 상장시킨 뒤 20억달러에 매각, 벤처신화를 일궈냈으며 소프트포럼의 주요주주다. 개인 자산을 비즈니스(20%), 부동산(20%), 현금(20%), 주식(40%)으로 나눠 관리하고 있다. 주식비중이 높은 편이다. 종목은 삼성물산, LS, 포스코 등 블루칩 위주다. 한국 주식시장의 다이내믹한 장세를 즐긴다고 한다. 매일 오전 8시30분이면 컴퓨터 앞에 앉아 전날 미국장세를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VIP고객들에 맞춤형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라이빗 뱅킹(PB)는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직접 매수, 매도가를 잡아 놓고 투자하는 편이다. 김정실 회장의 자택은 장충동에 있다. 강북, 강남의 중간이라 이동이 편하고 남산이 있어 산책하기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김 회장은 "최근 한국은 주식시장이 좋다. IT분야도 호조다. 미국 경제는 한국보다 조금 더디게 회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정 기자

2010-10-13

[사람 人] 8년째 택시 드라이버 데이비드 윤씨

"돈 안내고도 잔돈 달라, 실컷 타고 신고해야지…치사한 손님도 많아요 나름 잘나가던 스시맨, 현금 100만불 모았지만 투자실패로 싹 날렸죠" 택시 드라이버로 삶이 어떠냐는 질문에 “인생 막장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다”는 멋진 말로 응수한다. 선박용 특수 전기 기사와 특수조명 기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스시맨을 거쳐 8년째 택시 드라이버를 하고 있는 윤씨. 오늘 사람in은 윤씨와 동승했다. #택시 이야기 -지금 택시…합법인가요 불법인가요? "저는 불법과 합법에 의미도 경계도 없다고 봅니다. 지금 TCP 붙여서 다니는 택시들 있죠. '합법이다'라고 간판을 내걸지만 사실은 TCP 허가 한두대 그외 대부분 택시는 TCP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불법인가요? 합법인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불법이나 합법이라는 법적 판단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TCP와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TCP 받는 비용이 연간 5000~1만달럽니다. 그냥 보험입니다. 매월 그 돈을 내면 택시비가 올라갑니다. 차라리 택시 타시는 분께 돌아가게 저렴하게 운행하겠습니다." -요즘 타운 3달러 명함이 많이 보이는데 가격 경쟁이 심합니다. "LA에만 한인택시가 대략 500여대 정도로 아는데 나홀로 택시까지 치면 700~900대까지 될 겁니다. 가격 경쟁이 심해서 문제가 많습니다. 콜을 받고 운행하는 경우에는 25% 콜비를 대표 전화에 내고 개스비는 대략 15%정도라 40%가 기본적으로 나갑니다. 거기다가 차 보험에 차 페이먼트까지 내면 50%~60%가 차량 유지에 들어가는데 3달러 받아서 60% 내고 나면…한인타운 3달러에 1달러30센트가 운전자 몫입니다. 이걸로 생활한다는 게 용합니다." #손님 이야기 8년 정도 택시를 했으니 대략 1만5000여명의 승객을 태웠을 거란다. 이 중에 '치사했던 손님의 기억'을 물었다. 껄껄껄 웃기부터 한다. "뭐 말할 수 없을 정도죠. 술 취해서 집도 모르고 차안에서 기절하시는 분은 양반입니다. '돈 내지 않았냐'면서 그냥 내리는 분도 있어요. 제일 치사했던 손님…술을 드신 분인데 부에나파크쪽에 도착했습니다. 난데없이 잔돈을 달라는 겁니다. 받지도 않은 100달러를 줬다는 겁니다. 하도 우겨서 그냥 내리라고 했더니 가더라구요. 기가 막혔습니다." -더 치사한 게 있지 않을까요? "이건…같은 한인끼리 좀 그런데…도착해서는 '이 택시 세금 안내죠' 이러는 겁니다.(말투는 경찰분위기였단다) '그럼 신고해야겠네' 하면서 빤히 쳐다봅니다. 그러더니 문 열고 가버리더라구요." -그냥 보내셨나요? "내려서 바닥에 침 한번 뱉고 말았습니다만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손님 중에는 정말 위험한 손님도 있다고 했다. -'세금 위협' 보다 더 위험한 손님이 있었다구요? "할머니 전화인데 가주 마켓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큰 길가에서 픽업하기로 했죠. 할머니가 문 열면서 '얼마예요?' 하시길래 '3불입니다' 했더니 주변에 숨어 있던 사람 대여섯명이 들이닥치는 거죠. 할머니가 함정단속 스파이였어요."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차량압류됐는데 그 보관료 토잉 비용 벌금 등 합쳐서 5000달러 정도 날아가죠. 지금까지 두번 걸렸으니 1만달러가 날아갔네요." -단속이 심한가요? "엄청납니다. 일반택시가 주당 1달러씩 돈을 거둬 30만달러를 LA시쪽에 줬데요. LA시에서 50만달러 매칭해서 불법택시단속반이 생겨났습니다. 그 전에 그냥 풍기단속반 담당일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사는 이야기 원래는 전기 기사로 샌디에이고를 기항지로 하는 크루즈에서 1년간 일했다고 한다. "배에서 1년 근무하고 내렸죠. 거기서 한국행 비행기를 태워주겠다는 중개인에게 많은 돈을 사기당했고 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한인 업소에 마구잡이로 전화를 걸어 '좀 도와달라'고 간청했죠. 그때 샌디에이고의 한 바비큐집과 연결됐고 한동안 그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전기 기술이 있는데 식당일을 했습니까? "전기 기술도 있고 특수 조명 기술도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일을 주죠. 그냥 밥은 먹지 않겠나 싶어서 식당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LA로 오게 됐습니다." -택시는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LA에 와서는 본격 주방으로 나섰어요. 한ㆍ중ㆍ양식에 일식은 한동안 무급으로 일했어요. 배우려구요. 스시맨 몇년 했는데 LA한인타운에서 가게 몇개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한인타운에 '1인당 얼마' 하는 가격 스타일도 아마 제가 처음 했을걸요." -나름 잘 나가던 스시맨었는데 택시를 하게된 사연이 궁금하네요. "조그만 가게에서도 매상이 하루에 7000달러가 나올 때도 있었어요. 현금으로 100만달러 정도 모았죠. 집 사람한테 딱 1년만 놀자 해서 놀았는데 그냥 놀기는 뭣하고 해서 이것저것 투자하다가 3년만에 싹 날려먹었습니다." -그래도 기술이 있는데 재기는 쉽지 않나요? "다시 스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회칼에 손을 크게 베었어요. 그러다가 업주하고 노동청 소송이 붙고 제가 졌는데…이어서 투자했던 데가 줄줄이 망가지면서 줄 소송이 생겼습니다. 계속 이리저리 불려다니니 레귤러한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택시를 하게 됐죠. 나름 시간도 나고 괜찮았는데 그러다 보니 햇수로 8년째가 돼 버렸습니다." -직업이 왔다 갔다 하면 부인이 힘드셨을텐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는 말을 두어번 되풀이하다) "묵묵히…그리고 따라와준 게…고맙죠. 남편 잘 못 만나서…."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떻게 돼 있을 것 같으세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돼 있을 겁니다.(웃음) 제가 이번에 이걸 하나 만들었습니다.(한인타운 지도가 3단으로 접힌 인쇄물을 내민다. 뒷면은 한인식당들 이름과 주종목이 빼곡히 적혀 있다) 택시도 스몰 비즈니스도 다 잘됐으면 하는 소망으로 만든 겁니다. 이걸 만들면서 택시 드라이버로서 꼭짓점은 찍었다고 생각하는데…다른걸 해도 미련은 없을 것 같네요."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어떻게 보면 택시기사는 밑바닥입니다. 그런데 저희도 먹고 살려는 노력은 똑같거든요. 그런 생각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인들 다 잘살았으면 좋겠어요. 서로 짓밟는 일이 많은데 그러지 마시구요." 만난사람= 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9-29

[사람 人] 도박 인생 30년 탈출 제프 김씨 "도박에 올인 하려 이혼까지 생각했었죠"

"틈만 나면 라스베이거스 행, 잘 나가던 사업체 3개 날려…단도박 치유로 힘들게 끊어" "도박은 재미가 아니라 질환, 혼자 힘으로는 절대 못끊어…끝은 패가망신 꼭 명심해야" 도박에서 도망친 지 1년 반 정도된 제프 김(58ㆍLAㆍ자영업ㆍ가명)씨. 올해 58세에 도박인생 29년. 인생의 절반을 도박판에 써버렸다는 김씨는 “도박 중독은 정신질환이기에 치료 받아야 하며 도박과의 싸움은 평생 긴장을 놓지 말아야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도박과 끈질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제프 김씨 부부를 만났다. - 하루 최고 많이 잃으신 건 얼마나 됩니까? 29년간 잃은 돈이 얼마나 되나요? (생각에 잠기던 제프씨) "대답하지 않겠습니다…제가 도박을 끊었다가 어떤 신문기사에서 도박으로 1000만 달러 날린 사연을 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네. 더 해도 되겠다' 생각하고 다시 손댄 적이 있습니다. 도박하는 사람 심리는 똑같습니다. 어떤 거짓말을 하고 이유를 대서라도 도박장에 갑니다. 초동에 분쇄해야 합니다." "부인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겠는데요" "그렇죠. 그런데…한참 도박에 미쳐있을 때는 이혼하고 싶더라구요." "가장으로 면목도 없고 미안해서 이혼하고 싶었나요?" "아뇨. 이혼하면 간섭없이 도박에 올인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신질환이라는 겁니다." 잠시 후 제프씨를 도박에서 건져낸 1등 공신인 부인 (켈리 김ㆍ46ㆍ가명)이 함께 했다. -그래도 도박을 끊으셨으니 다행입니다. "끊은 게 아니라 싸우고 있다고 봐야죠. 어쩌면 이 싸움은 평생갈지 모릅니다."(남편) "사실은 최근 20개월 안에 두세번 더 갔어요. '아 이건 병이구나'는 생각이 딱 들 정도였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서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부인) #도박과 만나다 총각 때부터 카지노 게임을 좋아했다. 결혼해서는 연휴만 되면 가족이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라스베이거스가 지겹다고 하자 리노나 래플린 등 카지노가 있는 곳으로만 바꿔 갔다. 제프씨는 "가족들 떼어놓고 저는 카지노에서 노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 다음 단계는 혼자다. 한달에 한번 정도 자동차로 다녀온다. "스트레스 풀기 위한 인조이 저스트 게임"이라고 말한다. 거의 매달 날아오는 공짜 호텔 메일의 유혹도 떨칠 수 없다. "돈주고 자면 300달러인데 공짜로 자고 게임 300달러하면 내 돈 쓰는 건 없잖아. 당연히 가야지." 그래서 또 찾는다. 그런데 막상 쓰는 돈은 천 만 단위 이상이다. 점점 금액이 커지고 카지노에서 돈도 빌려쓰기 시작한다. 휴일도 지나고 거래처와 약속한 날이 지나도 제프씨가 LA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다. 카지노에서 쓴 체크가 현장을 알려줬다. 어머니 남동생 부인이 제프씨 검거(?)에 나선다. 온 가족 사이가 사단이 나고 제프씨는 미안함에 3개월 넘게 도박을 하지 않는다. 도박인생 14년째 일이었다. 그러나…. #도박에 빠지다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옵니다. 제대로 망가지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제프씨는 비행기에 올랐다. 돈 한푼 없이 가도 카지노는 쉽게 대출해준다. 갚고 잃고를 계속한다. 여기서 비즈니스 3개 중에 가장 큰 것을 날려버린다. 정신이 번쩍 들어 도박을 멈춘다. "절대 안 하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직 두개 남아 있잖아. 수입도 나쁘지 않아. 내가 왜 재미있는 인조이를 안해야 되지? 가야지 그럼." 자기를 합리화시키면서 또 갔다. "도박하는 사람들 심리는 똑같습니다. 멈추고 싶죠. 도박장에 가면서도 '아 이거 이러면 안되는데' 합니다만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죠. 게임이 돌고 10분 지나면 저도 미쳐 돌아갑니다. 아무 것도 안보이고 생각도 안납니다." -본전을 찾아야겠다. 한번에 왕창 딸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계속하게 되나요? "5년 이상 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짜릿한 맛 혹시 아시겠어요? 돈 빌린 거 본전 이런 생각 없습니다. 그냥 정신질환에 걸린 겁니다." -사업체도 있고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더 갔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비행기 타는 시간도 아까워집니다. 호텔도 필요없잖아요. 어차피 테이블에서 밤 새는데…. 그러다가 LA 인근 로컬 카지노를 찾기 시작합니다. 패가망신 문턱에 다다른 겁니다." 제프씨는 로컬 카지노에서 사채를 끌어쓰면서 남은 비즈니스와 집까지 전부 날렸다. "제가 말씀드렸지만 평일 새벽에 로컬 카지노에서 동전으로 머신하는 분은 정말 막장입니다. 더 위험한 것은 부부가 함께 하는 겁니다. 하나는 중심을 지켜야 재기도 회복도 가능합니다." 부인에게 감사해야 하겠다고 하자 옆에 있던 부인은 "휴~"하는 짧은 한숨으로 그간의 고생을 표현했다. "말로 다 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중심 놓쳤으면 저는 뭐 이미 없는 인생이죠."(남편) #도박에서 도망쳐 나오다 제프씨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치유센터나 교회 같은데다 '저 도박 끊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라고 전화 한번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도박을 끊을 수 있습니다." 부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시어머니가 남편을 끌고 치유센터에 갔죠. 그때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제프씨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실은…센터에 갈 때 '따라가주면 빚 좀 갚아주겠지. 잠시 안 하는 척하자. 작전상 후퇴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제정신이 아닌 거였죠." -그래도 결국 빠져나오는데 성공했군요. "…도박장에서 인조이 한다와 도박한다는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둘다 종착역은 패가망신입니다. 단 한가지 가족을 잃기 전에 나와야 합니다. 마지막 재기도 못합니다. 절대로…." 결국 제프씨도 스스로 빠져나오진 못했다. 어머니 부인 동생이 살린 셈이다. 그래도 아직 끝이 안났다. #도박과 싸우다 완전히 끊은 거냐는 질문에 "이 싸움은 평생해야 할 겁니다. 근데 우리가 이기고 싶네요"라고 답한다. 지금도 짜릿한 기억들이 난단다. 온몸에 전기가 통했던 찌릿한 큰 판. 며칠 밤 새고 나왔을 때 두세시간 귀를 울리던 슬롯머신의 이명. 당구에 미친 사람은 누웠을 때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지금도 도박 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제가 뭘 잘한 게 있어서 인터뷰 하겠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분들 도박은 정신질환입니다. 가족을 잃어선 안됩니다. 상담 전화할 용기만 있으면 도박은 끊을 수 있습니다. 도박에서 나와 재기하는 한인들을 많이 보시고 얘기도 듣기 바랍니다. 저도 기꺼이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만난 사람=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9-22

[사람 人] 변호사·목사 겸하며 성·속을 오가는 박윤근씨

엔지니어 직장생활 접고 변호사 도전 '목사 같다'는 아들 말에 기도 끝 결심 더불어 행복한 세상에 일조하는 게 꿈 그보다 이틀 전 LA한인타운에 있는 ‘박 로펌(Park law firm)’을 찾았다. 특허법을 전문으로 하는, 인자해보이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변호사를 만났다. 박윤근 변호사다. 박윤근 목사와 박윤근 변호사.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변호사는 세상의 분쟁에 뛰어들어 해결해주는 ‘세상적인’ 직업. 그 반대편에는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을 하는 목사가 있다. 변호사이자 목사인 박윤근씨와 함께 세속과 성스러움의 경계를 넘나들어봤다. #1 변호사 박윤근 열세살 때 이민온 박윤근(50) 변호사는 전형적인 1.5세다. 시작은 엔지니어였다. 공과대학을 나와 항공우주산업체인 휴즈사를 다녔다. MBA를 마치고는 GE로 옮겨 계속 인공위성 관련 일을 했다. 그러다가 부인(미셸 박ㆍ마취과 전문의)이 의학박사가 되면서 자신의 길을 재 점검한다. -인공위성 엔지니어와 변호사도 매치가 잘 안되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웃음) 직장 8년 정도 다녔는데 앞으로 인생이 너무 뻔한 거예요. 마침 아내가 일을 하게 되면서 '좀 쉬자. 그런데 의미있게 쉬자' 하다 로스쿨을 가게됐습니다." -특허법 전문인데 엔지니어와 관련이 있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잘 할 수 있을까 생각에 로스쿨 3학년 때 변리사 시험을 봤는데 됐어요. '특허법 변호사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변호사로서 불만족 스러워서 목사를 하신 건 아니죠? "(웃음) 전혀 아닙니다. 점점 일이 많아져요. 한국의 기술력이 커지면서 한국과 미국간 특허의뢰도 많아졌고 제 일도 같이 늘어납니다. 제가 올 때(73년) 한국의 기억은 가난이었는데 이제는 뭐 기술력에 국력도 커져서 마음이 뿌듯합니다." -변호사로 가장 보람있을 때는 언젭니까? "특허를 받으신분들은 계속 개선을 하게 되죠. 특허를 수십번 갱신한 분이 있는데 갈수록 사업이 잘되요. 변호사로서 같은 한인으로서 정말 기쁜 일입니다." 변호사로서 확고한 지식과 보람이 있는데 목사가 된 것이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 -변호사가 먼저 되고 목사가 되신 건가요? "네… 지금도 뚜렷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94년도예요. 변호사 시험 3일차를 치고 집에 왔어요. 마당앞에 메일함을 여는데 작은아들(마이클 박ㆍ21)이 쪼르르 달려와서 '아빠! 아빠 목사님 같애' 이러는 겁니다. 변호사 시험을 치고 왔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들어가서 아내와 함께 기도를 했어요.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하면서요.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났습니다." #2 목사 박윤근 16년 전의 일인데 변호사 시험날의 기억을 소상히 하고 있었다. 안수집사로 라하브라 삼성장로교회에 있던 중 또 다른 일이 생긴다. 97년도다. 목사 한분이 신학교 가라고 입학 원서를 들이민다. 그후 신학 공부가 시작된다. -변호사면서 목사로 개척교회를 하겠다는 생각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네… 맞아요. 2002년에 목사안수 받고 2005년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제가 한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이 '해야한다'고 하신 것 같아요." -신도들 대부분이 미국인들입니다. "한인분들은 정말 교회에 열심이세요. 교회와 성도들이 거의 하나죠. 근데 저희 교회는 어떻게 보면 정말 미국식입니다. 예배는 등록신자가 거의 다 나오는편이구요. 기도도 뜨겁습니다.(실제 예배가 은근한 가운데 뜨거웠다). 그래서 저는 예배 말씀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준비하다 토요일 밤새는 적도 많죠." -변호사고 부인이 의사면 돈 걱정은 없으실 것 같은데 목사 월급도 있나요? "하하하 이 인터뷰는 정말 전부 다 물어보네요. 돈 걱정은 크게 없죠. 목사 사례는 있습니다. 저희는 목사의 하우징 부분 중 일부보조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목사님이 4분이신데 많지는 않지만 사례는 있구요." 전혀 새로운 장르의 목사가 아닌가 싶었다. #3 변호사+목사 박윤근 세상적인 직업 변호사와 성스럽고 영적인 목사… 두 개가 어울릴수 있을까? 그래서 구체적으로 물었다. -의뢰인은 변호사가 좀 부도덕하게라도 자기 편을 들어주길 원할텐데 그럴 때 목사로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네? 하하하. 그렇네요.(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란다) 근데 정말 다행스러운 게 특허법은 그런 경우가 드뭅니다. 특허 등록이라든지 상표권 무단 사용 같은 경우도 첫단추 잘못 꿰면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의뢰인이 오시면 모두 까놓고 그 안에서 최대한(최소한) 으로 만들자고 합니다." -의뢰인과 상담이 끝나면 손 붙잡고 기도도 하십니까? "(웃자고 한 질문인데 진지하다) 그럼요.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 분이 하시는 일이 잘되고 해결되길 기도해드립니다. 기도하면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문제도 더 잘풀리는 것 같고." -계속 의문인데 어떻게 변호사 목사를 같이 할 생각을 하셨어요? 쉬는 날도 없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한 게 아닌것 같아요. 제가 했다면 월~금은 변호 토~일은 설교 이런식으로 안 살겁니다.(웃음)평일엔 사람 심부름 주말엔 하나님 심부름 하면서 산다고 할까요." -지금 60명 정도 예배보는데 더 부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그렇죠. 저는 지금도 좋습니다. 설교할 때 한명한명 눈 마주치는 게 더 은혜스럽죠." -변호사 목사로서 앞으로 꿈은 뭔가요? "지금 저희교회 성도들 70여명 그리고 우리 펌 직원들 17명 그리고 제 가족들 모두 하나님안에서 행복한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모든 의뢰인들 그리고 한인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 그게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노력할거구요." 만난사람= 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9-15

[사람 人] 어린이 한국어 교육 20년 양미숙씨

킨더가튼 한국어반 전념           부모들 인식 이전과 달라 정체성 심어주는데 보람           모국어 구사 취업에 유리 2세 한국어 교사 나와야           존댓말로 예의도 좋아져 남가주 한국학원 주말 한국학교에서 킨더가튼 한국어반만 20년 가르쳤다는 비비안 양(양미숙ㆍ50)씨의 목소리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남가주 한국학원 산하 12개 주말 한국학교 중 한 곳이 운영되고 있는 샌퍼낸도 밸리 그라나다힐스 고등학교를 찾았다. 개학이라 500여명의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들이 반갑게 만나고 있다. 이번 주 ‘사람in’은 20년간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심어주고 있는 양 선생님의 토요일을 함께 했다. -주말한국학교 선생님은 토요일이 없잖아요. 20년이면 가족들이 싫어했을 거 같은데. "아 그렇네요. 아이들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는데… 아마 아이들도 '토요일은 한국학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첫째 애가 세살 때부터 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실 남편(양만식ㆍ자영업)과 시어머니가 이해 안해주셨으면 못했을거예요. 그런데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은데 제가 왜 인터뷰 대상이 됐는지…." -(사람in은 질문 받는 경우도 많다) 킨더가튼 한국어반만 20년째인데 새싹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킨더가튼반만 고집하신 이유가 있나요? "고집한 건 아니고(웃음) 제가 유아교육을 전공했어요. (LA 스테이트 프리스쿨 수퍼바이저를 했고 국제성서대학 유아교육과 교수다). 그런데 애들한테 한국말 가르치는 걸 꼭 하고 싶은 겁니다. 아이들과 한국어 이 두개가 만나는 곳이 킨더가튼 한국어반이더라구요." -아이들과 함께하려면 지긋한 인내심이 많이 필요할텐데. "음 저는 그냥 재밌어요. 근데 이 킨더가튼 한국어반에는 좀 색다른 애착이 있습니다. 뭐냐면… 아이들이 세상과 사회와 친구를 처음 만나는 곳이 킨더가튼이거든요. 그때부터 아이들의 사회와 아이들의 사회생활이 시작되는데 그곳에서 한국어와도 처음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아이들이 한국어와 처음 만나는 그 곳에 제가 있고 싶었어요." -어릴 때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까요? "그럼요. 우리 문화를 잘 담고 있죠. 특히 '드셨어요. 오셨어요' 이런 존댓말은 한국이 어른을 공경하는 멋진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걸 잘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한국어 존댓말을 배우고 나면 영어에는 왜 존댓말이 없는지 생각하게 되고 존댓말 대신 모습으로 공경하는 걸 보여줍니다. 타인종 부모들로부터 한인 어린이들 칭찬을 제가 많이 들어요(웃음)." -킨더가튼 한국어 교사 20년 세월에 변한것도 많을텐데요. "부모님들 트렌드가 바뀌네요. 20년간 대충 3단계 정도 변화가 있었던거 같은데. 처음에는 자녀들 영어공부에 올인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한국학교에서 친구와 놀게 하려고 보내는 분위기였습니다. 부모님들이 교대로 한분씩 어린이 대여섯명을 데리고 오고 다른분들은 일하죠. 한 10년전부터는 1세 학부모들이 좀 달라지셨어요. 모국어를 모르면 안된다 너의 정체성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나하고 소통도 한국말로 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1.5세 2세 학부모들도 많아요. 본인들도 한국학교에서 배웠지만 영어가 편합니다. 그런데 애들한테 한국말을 가르쳐야 된다는 분위깁니다. 그래야 글로벌 시대를 살수 있다는거죠." -20년이면 이런저런 일도 많았을텐데 "테네시주 시골에 살다가 온 다섯살짜리 꼬마였는데 처음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태어나서 처음 노란색 피부의 꼬마들을 본 거예요. 부모님 말을 들어보니 몇년 뒤에 자기 머리는 노랗게 되고 얼굴은 하얗게 될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더라구요. 그래서 부모는 '이거 안되겠다' 해서 LA로와 한국말부터 가르치게 됐답니다. 다행히 그 꼬마는 자기가 하얗게 되지도 않고 돼 봤자 별것 없다는 걸 알게됐어요. 그 다음부터 애들하고 너무 잘 지냈어요." -2세들 한국어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은 많이 듣는데 피부에 와 닿게 좀 말씀해주시죠. "제일 중요한게 정체성이죠. 지금 그냥 미국인으로 통칭하지만 좀 더 가면 유럽계 중동계 아시아계 다 다르잖아요. 다양한 사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이라는건 큰 장점인데 그 문화를 몸에 녹이고 있으면 더 좋죠. 음 제 딸(양혜은ㆍ23)이야긴데 UC버클리를 졸업하고 뉴저지쪽에 가 있어요. 한국어가 능숙한 편입니다. 요즘 취직 안된다고 난린데 얼마 전에 취직이 됐다고 알려왔어요. 축하한다고 했더니 나더러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을 잘 쓰고 읽을줄 아는 게 취직하는데 큰 도움이 됐대요. 세계에서 제2외국어를 가장 못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조사도 있잖아요. 우리한테 한국어는 제2외국어가 아니라 모국어죠. 모국어는 가슴에 지니고 영어는 기본으로 하고 제2외국어까지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세계 최고가 될겁니다." -앞으로 하고 바라는 게 있다면. "1.5세나 2세 한국어 선생님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물러날 때 되지 않았냐. 너무 장기집권한다'면서 놀리는데 2세들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걸 보면 얼마나 뿌듯할까 생각이 듭니다." ■양 선생님의 한마디…"'엄마 아빠 두 개 있다'고 해도 야단치지 마세요" 1. 말할때 기죽이면 안되요= 말을 배울 때 되든 안되든 무조건 떠들라고 하죠. 그래야 느는데, 윽박지르면 주눅듭니다. 아이들이 ‘방에 아빠하고 엄마하고 두개가 있어요’라고 말하더라도 윽박지르면 안됩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두명이 있어요?’ 이런식으로 자연스럽게 고쳐주면 알아듣습니다. 야단맞고 주눅드는 순간부터 애들은 입을 닫습니다. 2. 영어로 한국어로 두번 말해주세요= 마켓에서 아이가 ‘엄마 캐롯’하면, 자연스럽게 ‘응 캐롯, 당근이야’이렇게 말해주시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외우게 된답니다. 3. 단어를 많이 알게 해주세요= 영어 단어를 따로 외웠듯이 단어만 많이 알면 한국어가 빨리 늡니다. 귀찮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영어, 한국어 번갈아 말해주고, 냉장고나 어디든지 영어 한국어 단어를 붙여주세요. 4. 부모가 한국어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해주세요=‘한국학교 가자’, 또는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이게 한국말로 뭐지’ 등 부모님들이 한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만난 사람=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9-08

[사람 人] 7080 공연기획 20여년…에이콤 이광진 대표

LA한인타운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난 윌셔 이벨극장은 LA 한인들의 문화 공간이다. 비싸지 않은 대관료에 1270석 규모로 아기자기한 소규모 공연에는 딱이다. 여기서 이광진(55ㆍ에이콤대표)씨를 만났다. 22년간 LA에서 이벤트·공연을 한 기획자다. 지금까지 70여건의 문화행사를 들고 150여회 무대에 올렸다. 그 중에서도 40, 50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7080콘서트를 가장 많이 올렸다. 그가 올린 공연의 70%이상이 윌셔이벨극장에서 열렸다. 오늘 ‘사람in’은 마음의 고향이 윌셔이벨극장이고 ‘미안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안고 산다는 7080 전도사를 만났다. "추억의 노래들 너무 좋아, 한인사회 함께 공감하고파…그룹 룰라 공연 기억 남아" "한국서 가수·연극 기획, 중년층 향수 위로하는 품격높은 공연 준비할터" 인터뷰 좀 하자며 전화를 했다. "아 오랜만입니다 천 기자. 근데…인터뷰… 할 내용이 있나요? 제가?"라며 쑥스러워 한다. 청산유수다. 공연이나 이벤트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는 이야기와 그래도 영혼에 온기를 불어넣는 작업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동안 도움 받은 것도 많지 않았냐고 먼저 물었다. "그걸 말로 다하겠습니까. 공연예술을 사랑하는분도 계시고 그냥 저와 친분때문에 도움주신분 등 뭐 이루 셀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를 비롯한 미디어들에게도 고마운 만큼 미안함도 많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소주나 한잔 하면서 하죠." -원래 한국에서도 이 분야 일을 하셨나요? "젊은 시절에 이대 앞 '맥심' 서대문에서 전유성씨가 운영하던 '도날드' 그리고 광교의 '태평양' 같은 카페에서 친구와 듀엣으로 노래를 한 4년 했었죠. 그런데 제대로 한 건 연극이었습니다. 극단 '춘추'에서 2년 정도 기획 일을 하다가 이민왔습니다." 부모 속깨나 썩였을 것 같았다. "말도 마십시오. 저희 아버님이 목사(이찬영ㆍ86세)셨죠. 책도 한 60권 내신 원로목사신데 말씀 안드려도 아시겠죠. 아주 난리난리였습니다." 1982년 이민. 미주동아일보 광고국ㆍ사업국에서 일하다 1988년 공연기획사 에이콤을 설립했다. 그때 당시 LA한인커뮤니티 공연문화를 물어봤다. "척박했죠. 많은 분들이 한국을 그리워했습니다. 한국을 싫어하는 분이 계셔도 한국 노래는 좋아들 하셨죠. 당시는 주로 교포 위문공연이란 이름으로 연예인들이 왔습니다. 제가 지금은 7080콘서트를 주로 열지만 제 첫 이벤트는 88년에 국립극단을 초청한 연극이었습니다. '피고지고피고지고'를 탐 브래들리 극장에 올렸죠." 그 후로도 연극과 악극 마당놀이 등을 올렸는데 95년 해바라기 디너쇼를 하면서 7080콘서트에 눈을 뜨게 된다. "95년에 해바라기 강인원 이동원 임지훈 이런 친구들과 콘서트를 올렸는데…리허설을 듣고 있는데 제가 노래에 쑥 빠져들면서 기분이 묘해 지는 겁니다. 솔직히 그 후로 매년 7080가수들을 초청하는데 한인들도 좋아하시지만 제가 너무 좋은 거예요. 제 마음에 '그리움'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더 중요한 걸 느꼈어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같은 세대를 위해 공연을 좀 더 많이 해야겠다 그런 각오같은 거 말이죠." 아이돌 그룹 중심의 요즘 공연에 대해 "제 영역은 아닌듯 하다"고 한다. 앞으로도 매년 또 다른 7080가수들을 초청해서 한인들의 그리움을 해소하는데 일역을 담당하겠단다. -7080콘서트는 매니아 관객이 꾸준한 편인것 같은데 그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거구요.(웃음) 일단 제가 준비하기도 편하고 듣기도 편하고 그렇습니다. 유익종이란 친구가 '이 밤~ 한마디 말없이~ 슬픔을 잊고져~' 이렇게 부르기 시작하면 저도 멍해집니다." -공연.이벤트 하다 망가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저도 70여건 중에 두번 정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많은 분들한테 민폐로 다가가는데… 여러모로 속 터졌던 게 2001년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한인커뮤니티 최초로 스테이플스 센터를 대관했습니다. 물론 제가 한 건 아닙니다. 잘 아는 다른 기획회사인데 공연이 너무 크다면서 도와달라고 해서 붙었다가 그 친구가 사라지는 바람에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물론 제 잘못도 있죠.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공연을 취소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행이죠." -잘 된 공연도 많았죠? "다섯박자가 다 맞아 떨어진 게 있었습니다. 96년인데 한국 가요 시장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급 반전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인기 절정이었던 댄스그룹 룰라가 표절시비가 붙어서 미국으로 와 있었어요. 그때 또 백혈병에 걸린 성덕 바우만 군의 이야기가 사람들 가슴을 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재기를 원하는 룰라에게 성덕바우만돕기 사랑의 콘서트를 제안했는데 이게 성공했습니다. 할리우드 파크에 관객이 1만5000명 왔고 골수 확인을 위해 500명이 검사를 자청했습니다. 수익금 중 2만달러를 아시아골수기증협회에 기부했죠. 룰라의 공연 사실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룰라는 재기에 성공합니다. 관객 기획자 공연자 스폰서 수혜자까지 다섯박자가 모두 들어맞았어요. 뿌듯했습니다." -도대체 공연기획하는 분들의 부인들은 어떤 분들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내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공연기획자는 수입이 일정치 않습니다. 망하면 1년 내내 수입이 없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 제 아내는 제가 하는 일을 반대한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딱 그 자리에 항상 있어 줬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부인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두고두고 오래오래 갚아야죠."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지는 일을 왜 하시는 겁니까. "요즘 공연은 앞에서도 밑지고 뒤에선 더 밑집니다.(웃음)…LA에도 저 같은 인간이 몇명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냥 제가 이 일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7080 콘서트는 계속 하실 거죠? "물론입니다. 제가 듣고 싶어서라도 해야죠. 그런데… 저는 마지막 공연은 꼭 연극을 올리고 싶습니다. 첫 시작이 연극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LA에서는 연극은 안된다 이런 통념이 있는데 지난번 강부자씨가 출연한 '친정어머니와 2박3일'은 흥행연극의 롤 모델입니다. 유료관객만 4000명이 넘었습니다. LA에 잠재 문화 수요층이 많다는 거죠. 이 사람들을 불러낼 퀄리티가 필요합니다." -본인이 딴따라라고 생각하세요 예술인라고 생각하세요? "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LA공연관계로 만난 가수 연예인들이 수백명은 됩니다. 그 중에서 재미있는 만남과 이야기를 내년봄쯤 책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그 제목으로 생각한 것이 '딴따라와 예술인' 입니다. 우리한테는 이 두 이름이 참 숙제죠." 그래도 본인은 예술인으로 살고 싶단다. 공연기획한 지 20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 공연기획이 뭔지 좀 알겠다'고 한다. 관객 출연자 스폰서 기획자 모두의 위닝게임을 위해 그는 오늘도 헛헛한 광대표 웃음을 날린다. 만난 사람=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9-01

[사람 人] 자동차와 36년 인생 김스운전학교 김응문 교장

간혹 생각에 잠긴 후 나오는 말에서는 깊이가 묻어나고 자동차가 가득 그려진 넥타이에서는 묘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동차를 말 할때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고, 음주운전 이야기를 할 때는 진지하고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미주 한인 첫 운전교사에 이어 첫 운전학교를 이끌어 오고 있는 김스운전학교 김응문 (70)교장이다. 오늘 사람in은 운전은 즐거워야 한다며 ‘인조이 유어 드라이빙~’을 외치는 김응문 교장과 동승했다. "한국 유신 피해 도미 밀물…운전 수요 급증 창업 결심" "하고 싶은 일 해서 즐거워…한인타운 DMV 설치 소망" 인터뷰 시작부터 살짝 당황스러웠다. 대학시절 전공은 철학(연대 철학과)이었다. 1969년 미국 유학(아주사 퍼시픽 대학)에서 전공은 사회학. 지금은 운전학교 교장이다. "소셜 워커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USC 석.박사통합과정에 시험을 쳤는데 아시안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시험과정에 열 다섯명이 토론하는 게 있었는데 영어도 문제였지만 제가 말할 기회를 안주는거예요. 인종차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응시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력 5년 이상의 현직 공무원과 선생님이었어요. 저는 추천서도 없었고 경력도 전혀 없으니 안된 건데도 그때 낙담은 정말 컸습니다." # 이야기 1-자동차 뭘하고 살까 고민하다 DMV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덜컥 됐단다. 그런데 새크라멘토로 오라는 것. 고민에 빠진다. '공무원이란 직업이 궁합도 별로 안 맞는것 같은데 새크라멘토까지 이사 가야 하나…' 결국 포기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이 김씨의 길을 바꾼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이 시작되면서 한국사람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여기서 운전을 해야 되잖아요. 미국에서 한인들이 운전 잘 하고 생활 잘하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할리우드에 있는 LA운전학교를 찾아간다. 교장이 흑인이었는데 반가워한다. 한국전 참전용사였고 노하우 대부분을 전수받는다. 일정시간 교육을 마치고 운전교사가 됐다. 1974년이다. "현재의 자리에는 1979년부터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어떻게 운전학교를 할 생각을 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숙명이지 않았나는 생각이 가끔 드는데…무엇보다 재미있어요." 곡절도 있었다. 절친한 친구가 운전학교를 못하게 방해(?)했다가 더 열심히 하게 만든다. # 이야기 2-친구 뉴욕에서 사업을 하던 친구가 부탁을 한다. "할리우드에서 남은 자투리 필름들을 다 구해달라." 영화 필름은 야드 단위 두루마리로 판매되는데 할리우드에서는 촬영 후 남은 자투리 필름은 모두 버렸단다. 당시 한국에서는 그 자투리 필름도 귀했다. 한국에 괜찮은 가격에 꾸준히 판매됐고 친구는 김씨에게 LA사무실을 맡아 달라고 했단다. 한국을 왕래하며 무역으로 돈 버는 방법에 눈을 떴지만 운전학교를 준비 중이었다. 고민 끝에 김 교장은 "돈도 중요하지만 난 자동차와 함께 하는 게 재밌다"며 사업은 손을 떼고 운전학교를 시작한다. "제가 지금도 그렇지만…억만금을 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운전도 버릇이고 습관인데 교육 제대로 받고 면허 제대로 따서 가는 뒷모습을 보면 뿌듯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입니다." 그 후로도 친구는 계속 LA사무실을 제안했는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우연치고는 참 고약했다. "친구를 교통사고로 보내고 나서 제가 운전학교에서 더 잘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방 과실인데 그렇게 한번에 가버렸어요." # 이야기 3-어머니 운전학교를 하는데 우선 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반대보다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단단한 김 교장 눈시울이 붉어진다)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셨죠. 출퇴근할 때 운전하는 것도 불안한데 하루종일 운전하면서 길에 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어머니는 늘 기도하셨고 아들은 지금껏 큰 사고 없이 길 위의 삶을 한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 "모두 어머니가 소중하지만 저는 좀 더했습니다. 길 위에서 일하는 아들을 위한 기도가 온전히 전해진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 미국에 모셔오고 여기서 하늘나라로 가셨죠." 김스운전학교는 한지붕 세가족이다. 운전교육 트래픽 스쿨 DUI프로그램까지 3가지를 운영한다. 보람됐던 일을 물었다. "90년대 초반에 조기유학이 많았어요. 딱 그만큼 조기유학생 음주운전이 많았습니다. 15주 다니면 약 400달러 정도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데 학생들이라 돈이 없죠. 교육만 받고 그냥 사라집니다. 다섯명이었는데 신고를 안했어요. 그때 같은 클래스였던 한분이 '교육 프로그램이 좋아서 애들 다시는 음주운전 안할 거다. 교육비는 내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내겠다'하면서 교육비를 다 내주는 겁니다. 좀 놀랐고 '다시 음주운전 안할 거다'는 말에 보람을 아주 크게 느꼈습니다." 김 교장은 앞으로 꿈을 한인타운 DMV 설치라고 한다. "과거에 진행한 적이 있는데 저는 안되고 어떤 비영리 단체가 해야할 겁니다. 한인타운 안에 꼭 DMV가 생겨서 면허시험을 제외한 다른 건 꼭 편리하게 했으면 합니다." 동승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간 김 교장은 DVD 확인 교실 정리 등 저녁 강의 준비를 한다. 마지막 한마디. "음주운전은 범죄입니다. 음주 차량은 달리는 살인 흉기입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8%이상은 유죄라는 걸 꼭 알려주십시오." "여성 음주운전 너무 많아요" ◆"한인여성들 음주운전이 너무 많이 늘고 있습니다."=김 교장은 한국의 통계를 예로 든다. 1996년 한국에서 여성 음주율은 54.5%. 그러나 1999년 여성 음주율은 84.3%다. 소주 알코올 도수를 낮춰 판매 타켓을 여성들로 잡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미주 한인들도 비슷하다는 것이 김 교장의 말이다. 특히나 알코올 분해가 남성보다 떨어지는 여성은 더 많이 DUI에 노출된다는 것. ◆"한국정서로 술은 음식의 일부죠. 미국은 마약의 일종으로 봅니다."=미국은 술을 보는 시각이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단속할 때도 마찬가지다. 술을 과하게 먹었구나가 아니라 심각한 범법행위로 본다." ▶방어 운전 팁 7가지…앞 차 급정거해도 차선 피하지 마라 1. 정면 충돌 위험이 닥치면 오른쪽으로 비켜가라. 왼쪽은 더 큰 사고를 유발할수 있다. 2. 제한속도를 지켜라. 10분 늦었다면 10분 늦게 도착해라. 3. 공간을 유지하라. 앞차와 안전거리를 3초 이상, 좌우에도 공간을 둬라. 위급 상황에 내가 빠져나갈 좌우를 둬라. 4.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는 날은 운전하지 마라. 5. 제어거리를 충분히 확보하라. 제어시간은 최소 15~20초를 확보할 정도로 멀리 보라.(시속60마일 1초=26미터) 6. 앞차가 급정지하면 급브레이크를 밟고 차선을 유지하라. 비켜나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작은 사고로 큰 사고를 막는다. 7. 타이어가 터지면 브레이크를 밟지마라. 가속페달에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지말고 비상등을 켜라. 직진할 수 있도록 운전대를 꽉 잡으라.천천히 도로 갓길로 나오라. 만난사람=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8-25

[사람 人] 중국-한국-미국 팔색조의 삶 량리리씨

중국 태생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약력 물었다. 하얼빈 사범대학 국어국문학(중국어)과 졸업, 대학원 수료. 하얼빈 고등학교 교사, 하얼빈 교육청 과장(장학사급), 중국 1급교사 자격, 국가 아나운서 발음 자격, 고려대학교 중국어 강사, LG그룹 인화원 중국 전임강사, 한국 육군정보학교 강사, 포항제철 연구소 강사, LG그룹 중국담당 강사…. 그녀의 한국 이름은 양경애, 미국 이름은 릴리 양, 중국 이름은 량리리(梁莉莉)다. 한자 그대로 풀어보니 향기가 난다. 자스민 꽃(莉)이 두개나 있다. 요철이 있는 이민자의 삶을 껴안고 서해를 건너고 태평양을 건넌 그녀의 삶에는 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에 대한 사랑, 미국에 대한 긍지가 묻어 난다. 오늘 ‘사람in’은 자스민 향을 따라 나섰다. "한국서 중국통 명성, 딸 교육 위해 미국행…무역 등 새로운 도전" "중국인은 자존심 대단, 무시 당하면 협상 결렬…거래에 관리 끼면 안전" #장면 1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1954년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한(漢)족이다. 인터뷰 중에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정확한 연도까지 쏟아져 나온다. -중국에서 어땠습니까? "38년 살았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저희가 참 어려운 세대였죠. 문화대혁명(10년간의 극좌 운동)이 제 인생을 바꾼 거 같아요. 학교에서 영어를 못 가르치게 하고 학교도 자기 성(중국의 지방단위)에만 가게 합니다. 결국 하얼빈 사범대학을 가게 됐는데 베이징 대학을 갔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공부 잘 하셨나봅니다.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인구가 4000만명인데 거기서 열 손가락안에 한 두번 들었습니다.(웃음)" -한국과 인연이 참 묘합니다. "저보다 아버지가 먼저 한국과 인연을 맺었어요. 1924년생이죠. 항일투쟁을 하셨죠. 팔로군이셨어요. 중국에도 광복이 오고 일본군이 물러가고 5년 뒤 다시 소집했답니다. '장개석 군이 미군과 함께 중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가 나가야 한다' 해서 다시 전장으로 나갔는데…압록강 넘어서 남쪽으로 가더랍니다. (중공군으로 한국전 참전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군단 3만명 중에 딱 2명이 살아왔답니다. 그 한명이 아버지였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국땅은 중국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한테 한국은 늘 궁금한 곳이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중국 1급 교사 자격에 순탄한 삶이 보장된 교육청 직원을 던지고 떠나 살아보겠다 결심이 쉽지 않았을텐데. "나아질 것 없는 곳을 벗어나 다른 세계와 접해보고 싶었는데…남편이 하얼빈 과학대학 화학 교수였는데 딸 하나 놓고 일찍 돌아가셔서…딸을 혹시 한국처럼 좋은 곳에서 키울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자신의 한국과 첫 만남은 하얼빈에서 도라지와 고사리를 수입해가던 한국 회사에 의해서다. 그 회사가 하얼빈의 각급 정부 관계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첫 방문때 한국에 매력을 느낀다. 두번째 방문에서 1급 교사자격을 드밀었더니 학원 강사로 채용 됐고 비자가 나온다. #장면 2 - 한국 서울 아나운서에게나 볼수 있는 정확한 중국어 발음에 역사 문화까지 강의한다는 소문은 이내 퍼진다. 고려대 중국어 강사가 됐다. LG그룹 연수원인 '인화원'에서 접촉이 온다.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해 중국을 알고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LG 인화원에 중국 전임강사가 된다. 육군정보학교에서도 포항제철 연수원에서도 강의를 한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책도 4권을 냈고 돈도 제법 벌었다. 하얼빈에 집을 두채 살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선 얼마 안되는 연봉인데 중국에서는 평생 만져보기 힘든돈이었단다. -한국에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제가 92년부터 8년 정도 한국에 살았어요.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거기다가 도전적이기도 하죠. 미주에 한국분들도 그런 정감의 깊이는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일하며 가장 뿌듯했던 기억은요? "LG 연수원에서 저하고 중국을 고민했던분이 몇천명은 될텐데. 지금 중국 시장에서 LG가 아주 잘 하고 있는걸 보면 '나도 저기에 한몫을 했구나'는 생각에 뿌듯해집니다. LG가 중국에서 현지인 2만명을 고용해서 제가 매달 교육했는데 그것도 뿌듯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차이 LG가 가지고 있는 기업이념 한국 직장과 중국 직장의 다른 점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것도 중국사람들이 한국과 기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중국과 교역이나 교류할 때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뭡니까. "자존심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차별대우 한다는 느낌이나 우습게 본다는 느낌을 주면 그때부터 만남은 해봤잡니다." -한국에서 시쳇말로 잘 나가셨고 지금도 필요한 분인데 미국행을 택하신 이유는? "이해 못하실 수도 있는데 딸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함께 살고 싶었는데… 17살 딸이 입국할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미국은 딸이 학생비자로 갈 수가 있더라구요. 당시는 돈도 좀 있었고 해서 미국에서 딸과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장면 3 - 미국 LA 고등학교지만 ELS에서 시작한 딸은 한번 흔들리더니 악착같이 공부했다.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메디컬 스쿨에 다니고 있다. 그러기까지는 역경도 많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LA공항에 도착해서 한인택시를 타고 옥스포드 길에 처음 내렸다. 거기서 다시 시작했다. -현재 생활의 느낌이 남다를 텐데? "제가 본의 아니게 글로벌하게 된 것 같아요. 중국을 생각하면 5000년 역사가 뿌듯하고 한국을 생각하면 너무 사랑스럽고 미국에 사는 건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미국생활은 어땠습니까? "와서 중국계 병원 CEO를 했는데 아주 잘 됐어요. 뭐… 오너가 직접하겠다고 해서 그만 뒀습니다. 아쉽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지금은 미국 생활 즐기면서 중국어 가르치면서 중국과 미국간 무역을 준비중입니다. 몇년 전엔 '대박'난 적이 있었는데 사업에 매달리다보니 딸 아이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정리하고 딸아이한테만 붙어 있었어요. 이제 자기 앞길 개척할만 하니깐 이젠 제것 좀 하려구요." -꿈이 뭐예요. "저를 필요로 하는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을 좀 더 정확하게 신뢰감 있게 만드는게 꿈입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릅니다. 미주에 한국분들도 중국과 교역이나 방문을 많이 하실텐데 제가 아는 한 많이 도와드리고 싶어요. 중국어도 열심히 가르쳐 드릴 겁니다. 언어는 문화의 핵심이니까요." 한.중.미 3국을 당당하게 다니면서 딸 하나 우뚝 키워내며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량리리씨. 그 이름 속의 자스민 향에는 미래의 꿈이 깊게 배어 있었다. ■리리가 전하는 중국 & 중국인 1. “중국 사람에게 배(과일)를 선물하거나 쪼개 나눠먹는 순간 모든 딜은 깨집니다”= 배는 중국어로 이(梨)를 쓴다. 하지만 이것은 이별하다의 이(離)와 발음과 성조가 모두 같아서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는 이별을 원할 때 배를 내민다고 한다. 2. “거북이 선물하면 중국 사람들은 모욕을 느낍니다”= 거북은 한자로 ‘구’를 쓰지만 중국 속어로는 ‘왕팔’로 부른다. ‘왕팔’이란 말은 남편이 부실해 부인이 밖에서 아이를 낳아온다는 심한 욕이라고 한다. 3.“중국과 교역할 때 정부 관리가 개입돼 있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중국에 급격히 자본이 밀려들면서 사기가 넘치고 있지만, 중국의 각급정부(중앙정부, 성정부 시정부등)기 개입돼 있다면 거의 믿어도 된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당 서기’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다. 만난사람=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0-08-18

[사람 人] "멀쩡한 애를 몽달귀신 만들 수는 없죠"

시작 4년만에 회원 5배 증가…답답한 부모들 짝 찾아 나서 부모들 조건 따지기 금물…다리만 놓고 뒷전 빠져야 일부 에티켓 실종은 유감…상대방에 대한 배려 중요 좀 조선시대 냄새가 난다. 그런데 회원수가 4년 반만에 500% 증가했다. 최근엔 비영리 단체로 등록도 했다. 좋은만남 클럽은 미주 한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몽달귀신·처녀귀신’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염원을 담은 비장한(?) 모임이기도 하다. 이 모임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지금껏 회장으로 총대를 메고 있는 이재수(77)씨를 만났다. -부모들이 나서서 자녀들 배우자를 고른다는 게 좀 구닥다리 방식 아닌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안 나서면 애들은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미국에서는 젊은 애들이 만날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한국은 뭐 친구들이다 친지들이다 죄다 나서서 소개해주곤 하는데 여긴 교회 말고는 없잖아요. 이 녀석들도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는 핑계만 대고… 그래서 우리가 해결해주마 하고 나선 거죠. 우리는 뭐 한가해서 지네 엄마하고 결혼해서 자기를 낳았겠습니까?" -그래도 부모들이 너무 나서면 문제가 없나요? "장.단점이 있죠. 부모들이 조건만 보고 '커트'할 때가 많아요. 원래 이 모임의 취지는 부모들이 먼저 만나 서로 문화적 차이나 환경을 짐작해 보고 자녀들을 만나게 해주려고 시작된 겁니다. 만나게만 해주고 부모들은 빠져야 되는데 너무 개입하려해서 문제죠." -장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부모들이 합의한 뒤에 본인들이 만나서 '필'이 통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되죠. 결혼을 앞두고 양가의 신경전 같은 게 거의 없습니다. 이럴 경우는 보통 2~3개월 안에 결혼 약속합니다." -지금까지 몇쌍이나 결혼에 골인했습니까? "4년 반 됐는데 30쌍 정도 됩니다. 회원수 대비 10% 정돕니다. 현재 회원은 616명인데 여자 351명 남자 265명입니다." 연령대는 여자 23~45세까지 남자 25~53세까지 다양한데 여자 28~30세 남자 32~34세 그룹이 가장 많단다. 모두 노총각 노처녀는 아니란 말이다. -20대 자녀들까지 부모가 나서는 건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늦기 전에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게 하려고 일찍 등록한다고 하더군요. 이런 경우에 성사율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회원입니까? "1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직으로 제한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없습니다." -노총각 아드님 때문에 이 모임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웃음)아들이 노총각은 맞는데 그것 때문에 시작한 건 아닙니다. 지금도 아들에게 푸시하지 않아요. 자기 인연이 있겠죠(아들은 52세 치과의사다). 좋은만남 클럽을 시작한 건 제가 맡았던 한인정신건강후원회 때문입니다. 한인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글도 쓰고 상담도 했는데 그 근원에 자녀 혼인 문제가 절반 이상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위장병에 만성두통 심지어 우울증까지 생긴 부모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자녀들을 맺어주면 어떨까 해서 시작한 거죠. 한마디로 애절함에서 시작된 겁니다." -처음부터 회원 모집이 잘 됐나요? "나부터도 '이게 잘 될까' 생각했고 실제 아무도 나서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교인이던 박창영씨에게 이야길 했더니 '좋은 일이니 하자'고 해서 둘이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첫모임이 2006년 3월이었는데 글쎄 120명이 온 거지 뭡니까. 벙어리 냉가슴 앓던 부모들이 달려온거죠." -에피소드들도 많을텐데. "이건 부모들께서 좀 주의깊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만나기로 했던 커피샵에 어머니들이 동석하기로 했어요. 여자쪽 두사람이 미리 와 앉아 있었고 남자쪽 두사람이 나타났죠. 그런데 남자쪽 어머니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아이고…어머니는 괜찮은데 딸은…' 아들 손 잡고 휙 나가버리더랍니다. 딸이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다행이지…딸이 '20분이 지났는데 왜 안오죠 엄마' 이랬답니다. 어머니는 끓어오르는 속을 누르고 '약속이 좀 잘못 됐나봐'하고는 자리를 떴답니다. 이런 에티켓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한인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해서 자괴감도 든다. 이런 일도 있었다. "뉴욕에 살던 청년이고 직업이 약사인데 부모와 아들 셋이서 LA로 이주를 했어요. 아파트에 함께 살았죠. LA의 약사 아가씨를 소개해줬는데 이 아가씨 부모가 '총각은 좋은데 아파트에 살아서 싫다'고 했답니다. 딸은 그래도 마음이 있어서 만나보겠다고 했는데 어머니 때문에 못 만났죠. 제가 봐도 아주 좋은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LA근처에 아주 좋은 집을 예전에 사놨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님 모시고 싶어서 그냥 부모님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있었던 거죠. 나중에 아가씨 집에서 후회를 많이 했지만 기차는 떠났지요. 그 아가씨 아직도 혼잡니다." 결혼이 성사된 30건은 다 기분 좋은 결실이란다. 치과의사인 청년과 리셉션을 도와주던 어머니 그리고 환자로 온 아가씨와 그 어머니. 어머니들끼리 처녀총각끼리 눈이 맞아 일사천리로 결혼으로 직행한 경우도 있단다. -오프라인 모임은 LA지역에서만 진행되는 것 같은데 타주의 관심은 어떤가요. "동부 쪽에서 전화가 많이 오고 직접 참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부쪽에서도 모임을 가져야 하는데 예산이 문젭니다. 비영리 단체 등록은 했지만 기부금을 받지 못해요. 첫 회원 가입할 때 200달러 받는데 이게 다 거든요. 매번 모임이나 소식 알림 비용으로 다 나갑니다. 어쨌든 10월쯤 뉴욕 모임을 가질까 합니다." 좋은만남 클럽은 한인 이민사회 문화의 한 단면이다. 가급적 한인과 짝을 맺었으면 이왕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배려 부족 자신에 대한 과신 에티켓 실종 등은 뜻하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회장님 우리딸 시집 보낼 때까지 그만 두시면 안돼요"라고 농반진반의 말을 했단다. 이 회장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이 회장의 잔소리 플러스 "제발 눈높이 좀 낮추세요" ▶다들 부디 눈높이 좀 낮추세요, 너무 조건에 집착하지 마세요, 자녀들 만나게만 도와주고 부모들은 빠지세요. 그래야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첫 만남에서 식사 자리는 피해야 합니다. 식사 때 자신의 많은 것이 드러납니다. 첫만남에 함께 식사 해서 잘 된 케이스는 10% 미만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모님들은 에티켓을 잘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전화를 해서 출신 학교를 물어보고 성에 차지 않으면 두말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는 뭡니까. 부모들이 데리고 살 거 아니잖아요. 자녀들에게도 제발 서너번은 만나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의사와 CPA가 만났는데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데 어떻게 처음 보고 뿅~할 수가 있나요. 처음에 안보이던 매력이 두번째 보이고, 두번째도 안 보이던 매력이 세번째 보일 수 있거든요. 만난 사람=천문권 기자

2010-07-28

[사람 人] 30년 한 자리 영업 '함경도아바이 순대' 이직심씨 "순댓집 딸 안부끄럽냐고 물어봤지"

“81년에 했으니깐 아이고 벌써 30년째네” “이 자리에서요?” “그렇지” “이름은요?” “그대로지, 근데 뭘 그래 물어쌌노. 막걸리나 한잔 해라.” 손이 크기로 유명한 함경도 아바이 순대의 ‘함경도 어마이’ 이직심(60)씨. 저녁 9시쯤 되자 손님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요새 와 이래 장사가 안되노, 내만 그렇나?”는 말과 함께 테이블에 털썩 앉는 함경도 어마이. 어라? 이러면 ‘취중 토크’가 되는데… 오늘 사람in은 하루하루를 이어 30년을 엮어 온 ‘함경도 어마이’의 스토리를 찾아갔다. 함경도 어마이는 손이 커서 막 퍼준다 성격은 완전 괄괄하다 욕을 바가지로 퍼붓기도 한다. 궁금하다. 대구 사람이 왜 '함경도 아바이 순대'로 가게 이름을 붙였지? "남편이 먼저 미국을 왔어. 천국이라고 하더라고. 좋아하는 콜라도 많고 집에 수영장도 있고 뭐…맨날 파티라데. 파티복만 댓벌 가지고 왔는데 파티는 무슨… 너무 답답해서 일 하겠다고 자청했지." 처음에 시작한 게 햄버거 가게다. "몇 달 배우다가 랭커심쪽(유니버설 스튜디오)에 햄버거 가게를 냈거든. 장사는 잘 됐는데… 아이고 말 통하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장사해야 재밌지. 넉달만에 팔았지. 남편이 '그러면 함경도 꺼 순대를 하라'고 하는거야." 시어머니가 함경도 분이었다. "다라이(대야) 놓고 숙주에 당면에 두부에 뭐 갖은 양념해서 순대 속 채우는 연습을 한기라. 되더라고. 그래서 장사에 나섰지." 처음엔 '함경도 순대'라고 하려 했는데 그때 남편 아는 사람 중에 (고)임양근씨(방송인.전MBC임택근 아나운서 동생)가 '아바이를 넣는게 부드럽다'고 해서 '함경도 아바이 순대'가 됐지." 30대 초반 젊은 아줌마가 순대 장사하는게 쑥스러워 처음엔 나이도 30대 후반으로 속였단다. -그만 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있었지. 우리딸(김지혜ㆍOC검찰청 검사)이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하는거야. 나중에 '순댓집 딸'이라는 말은 안듣게 할라고 그만 두려고 했거든. 그런데…(순간 눈물이 핑 고인다) 내가 물어봤다 아이가 '순댓집 딸이라는 딱지가 부끄럽지 않냐'고. '뭐가 부끄럽냐 엄마가 힘들어서 걱정'이라고 하더라.…딸 하나 아들 하나 당당하게 키우고 싶었고 그렇게 커줘서 너무 고맙지." 씩씩한 어마이도 결국 이 대목에서 목이 멘다. 어마이는 인터뷰 중 두번 목이 멨다. 딸과 어머니(89세) 얘기를 할 때. 양로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매일 한번 이상 찾아가서 귀여움(?)을 떨고 온단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어마이의 남편(고 김호연씨)은 '멋진 한량'이었단다. 사병 출신으로 남가주 해병전우회장도 했다. 신의도 있었던 것 같다. "순댓집을 하는데 돈이 좀 모자란기라. 남편이 돈을 빌려왔는데 그게 조인하(전 LA한인회장)씨한테 빌린건데 조 회장이 집을 담보로 잡히고 빌려줬더라고. 조회장도 멋지지만 남편도 신의가 많았던기라." 이혼의 아픔도 있었다. "살면서 '아 이건 실수다' 한 게 이혼이야. 그 양반 한량이었거든. 나중에는 돈 한푼 안 벌어왔는데 그래도 벤츠 s클라스 타고 다녔지. 내가 뒤에서는 지랄(괄괄한 대사가 순간순간 쏟아진다)해도 애들이나 사람들 앞에서 남편 한번도 무시한 적 없었거든. 뭐 애들 둘다 대학 가면 두고보자 하는데 근데 누가 생겼는지 집을 나가버렸잖아. 잡아야 되는데 타이밍 놓치고 그러다가 폐암이 걸려가지고…10년 전에 세상 베릿다(버렸다)." -(뜬금없이 물었다)보고싶지는 않으세요. 다시 태어나면 그 분하고 결혼하실 거예요. "요새 보고 싶을 때가 많아. 다시 태어나면 다시 결혼 해보고 싶다. 지금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티격태격 안하고 잘 살 수도 있었을 거 같거든. (잠시 머뭇하다) 마지막에 돌아가기 전에 아들 딸이 그 집에서 살았다. 지네도 그러고 싶다 하고 나도 맘이 그렇고 해서…." 어느날 고통이 극에 달한 남편이 모두를 불렀단다. 잊을 수 없는 세마디를 어마이가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런 모습 보여서 정말 미안하다 지혜 엄마 당신 진짜 수고 많았다 내가 식구들한테 잘못한 게 참 많은 것 같다…이 세마디. 네명이 붙들고 한참을 울었단다. 그리고 며칠뒤 별세했다. -(말을 살짝 돌렸다)잘 퍼준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성격이 괄괄하다던데요. "괄괄한 게 아니라 더럽다고 했겠지(웃음). 나도 '이러면 안되는데'한 적이 많거든 근데 그게 잘 되나. 쭈글시러버서(쑥스러워서)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는거지." 한가지 예를 들어줬다. 한 손님이"저 순대국에 순대가 2개밖에 없어요. 왜 이래요?"했단다. 어마이는 "엄마야 그럴리가"하며 손님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확인한다. 7개 들어있다. 난리가 쏟아진다. "야! 니는 이게 두개가?" 설마 그랬겠냐 싶었지만 진짜란다. "더 달라면 확실하게 더 주거든. 근데 이상한 소리 하믄 못 참는다." 30년을 한 자리를 지킨 이유나 비결을 물었더니 "내가 단순해서 그렇지 뭐"라며 웃어 넘긴다. 괄괄한 성격도 자신의 단순함 때문이란다. 그러나 3번에 걸친 8시간의 인터뷰 말미의 느낌은 달랐다. 괄괄함과 강인함(사실은 강한 것처럼 보이는)의 저 밑둥지에서 올라오는 무엇인가 있었다. 사람냄새였다. 함경도 아바이순대 2층 나드리 관광여행사 임은숙 사장의 말이다. "16년 윗층 있으면서 친해진 건 4년됐는데 그 전에는 몰랐어요. 함경도 어마이한테서 그렇게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줄은…." 강인함으로 30년을 엮어온 줄 알았지만 아니다. 폴폴 나는 사람냄새가 정으로 흘러들고 스며들어 엮여진 30년이었다. "앞으로 사람들에게 더 잘 해야지. 우리 어머니한테도 더 자주 가볼라고. 어머니가 있으니 내가 있고 또 우리 딸 지혜가 있잖아. 요즘 좀 어렵긴 한데 더 열심히 살아볼란다." in 뒷담화…"난 30년 동안 쌩얼이야" ▶“내 본명 아는 사람, 거의 없다~” (이름을 한사코 안 밝히려 했다. 본명은 이직심. 친언니는 이정심이다. 부모님이 정ㆍ직한 두 딸이 되라고 정심과 직심으로 지었단다.) ▶“내가 쌩얼 30년이다. 앞으로 더 쌩얼해야지” (함경도 어마이는 화장을 안한단다. 화장을 하면 음식 냄새 맡을 때 냄새가 섞여서 항상 같은 맛을 낼 수가 없다며) ▶“이 집에 앉으면 그때부터 다 식구다. 패밀리~” (두번째 인터뷰 때 4개 테이블 전체가 거의 하나된 분위기에 시키지도 않은 안주가 막 나오며-일명 퍼주기-) ▶“김치찌개하고 계란말이 주세요” (역시 두번째 인터뷰 때 4개 테이블 전체 오더는 김치찌개였다. 본업인 순대에 계란말이, 김치찌게, 삼계탕도 맛있다. 전화 먼저하면 만들어준다) 만난 사람 = 천문권 기자

20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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